《토지》, 그리고 《반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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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1.04 조회수 : 1417 | |
《토지》, 그리고 《반야》
오랜만에 송은일 대하소설 《반야》(문이당 펴냄)로 밤을 밝힌다. 원고지 2만 장 가까운 10권 장편소설이다. 동짓달 긴긴밤의 소일거리로 너무 쉽게 시작했는지 모른다. 수목원의 땅이 얼어 있는 동안은 정중동(靜中動)의 자세로 새 봄에 해야 할 일 구상으로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했다. 군자는 한가한 때도 행동이 여전해야 하는데 잠깐 짬이 난다고 이 소설을 손에 잡은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경박단소(輕薄短小)한 세태를 몸으로 거스르며 혜성처럼 나타난 대하소설을 읽어낸 뿌듯함 때문일까. 읽는 고통도 축제로 생각했다. 20년 전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21권을 출판하면서 대여섯 번씩이나 읽어 내던 그 눈이 아닌 걸 새삼 느꼈다. 40년 동안 활자에 혹사당했던 시력이 직업병으로 들어앉은 모양이다. 두세 시간 책장을 넘기다 보면 활자가 자꾸 작아지다 뿌옇게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잠시 책 귀를 접어 두고 눈을 들어 먼 산의 초록을 찾거나 얼어붙은 하늘을 할퀴고 가는 바람이라도 쫒으며 한참 동안 눈을 쉬어야 한다. 소설의 재미를 놓칠세라 돋보기라도 걸칠 때면 곧 멀미하듯 현기증을 느꼈다. 그럼에도 촘촘히 쳐 놓은 거미줄 같은 그물에 갇혀 작가가 이끄는 대로 산맥을 넘고 강을 건너는 유쾌한 포로가 되었다. 작가의 힘은 이런 것이다. 바쁘다던 일상을 탈옥한 열흘 동안의 황홀한 실종이었다. 대하소설은 신문이나 월간잡지의 연재를 통해 탄생되었다. 내가 읽은 대하소설 《조선총독부》, 《장길산》, 《토지》, 《혼불》, 《태백산맥》들이 그러하다. 한 작품에 매달리는 몇 년에서 몇십 년의 고행은 작가의 몫이겠지만, 충성스런 애독자의 피드백과 격려도 있고 삶의 터전인 원고료의 지원도 있다. 그러나 《반야》는 1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작가 홀로 삶을 헤쳐 나가며 공들여 쌓은 신작(新作) 전작장편의 거탑이다. 전작(全作)이기에 몇 번을 갈고 닦았을 스토리가 튼튼할 수밖에 없다. 작가는 이래야 한다는 선언 같은 정면돌파에 박수를 보낸다. 떠도는 삶의 숱한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기 위해 선등무(屳登舞)를 춰야 하는 우리의 주인공 ‘반야’는 작가 자신인지도 모른다. “맨발로 작두에 올라서면 작두날의 서슬이 정수리까지 아찔하게 관통한다. 그때 정신은 작두날의 서슬처럼 푸르러야 한다. 그 맑음이 신명의 날개로 피어나 신과의 교통, 선등이 작두 탑에서의 접신(接神)이 이루어진다.” 긴 시간 이 작품을 지켜 내 출판한 임성규 발행인의 뚝심도 지금 사람답지 않게 곱다. 새해에는 작가나 그를 위해서라도 밀리언셀러의 신천지가 열리는 활화산의 불꽃을 보고 싶다. 《토지》의 처음이 한가위 보름달의 군무(群舞)로 시작하듯, 《반야》의 처음도 무속의 굿판으로 대하소설의 문을 연다.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사는, 그래서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반야(般若)는 지혜요, 밝음이요, 생명이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깨달음이다. 남보다 밝은 심안(心眼)으로 국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타인의 생명을 돌보라는 의미다. 《반야》의 무대인 18세기 영조-사도세자-정조 시대 궁궐 안팎을 넘나드는 치밀한 공간묘사와 무녀세계의 이상향인 사신계(四神界)의 절묘한 장치는 신 내린 사람의 뭇기(巫氣)를 훨씬 넘어서는 작가의 내공(內功)을 짐작하게 한다. 사신계는 모든 목숨값이 동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조직이다. “사람들의 고통이 모여 짠 그물이고 꿈으로 잣은 비단이다.”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사람들의 맺힘을 풀고 고통을 덜어 주는 무녀 반야의 존재이유가 여기에 있다. 헝클어진 현실에 나도 사신계의 한 사람이고 싶다. 이에 동의하는 독자들을 인사동 어디에서 독후감의 향연 한판에 초대하고 싶다. 그 자리에 반야가 재림할지도 모를 일이다.
송은일 《반야》, 전 10권, 2017년 12월 문이당 펴냄
이 글의 일부는 2018년 1월 4일 〈한국일보〉의 '삶과 문화' 칼럼에 기고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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