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장가가는 날
작성일 : 18.05.16   조회수 : 1197

시집 장가가는 날



아기의 울음소리는 생동하는 나팔소리다. 고령화시대를 넘어 이제 고령사회로 고착화되는 지금은 희망의 축포(祝砲)이다. 인구절벽의 대란은 아주 가까운 미래에 닥칠 재앙이다. 인구감소로 10년 후면 8할이 빈집일 거라는 일본의 우울한 예측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만은 없다. 고령인구가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면 이를 부양하려면 자식들의 허리가 휠 텐데 또 한 세대 후 우리 손자들이 살아갈 사회는 어떠할지 두려움이 앞선다. 인간의 존엄은 저 멀리 가고 없을 것이다. 부지런히 태어나야 하는 아기의 포효하는 울음소리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딴다고 우선은 예식장이 붐벼야 한다. 

 

마흔 가까운 아들이 늦장가를 간다. 원만한 가정의 성품 좋은 규수를 찾았다. 여성의 사회참여 성취를 넘어선 가정의 행복을 가꾸는 동반자였으면 좋겠다.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10년 가까이 혼자 밥을 끓여 먹는 미국 유학생활의 삶이 안쓰러웠다. 처음에는 반찬을 어떻게 양념해야 하는지부터 소소한 살림살이에 대해 오고가는 어미와의 전화통화도 애써 못들은 척했다. 여기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은 자식을 곁에 두고 싶은 내 욕심일 것이다. 아버지의 둥지를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서는 한 단계 도약을 꿈꿀 수 없나 보다. 나도 군대를 마치고 “그렇게 힘들게 권력과 싸우지 말고 이제 농사나 같이 짓자”는 아버지의 염려 가득한 눈빛을 애써 외면한 채 손에 잡히지 않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아버지의 둥지를 떠났었다. 이것은 어쩌면 아들의 본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섭섭함을 감출 수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한 학문의 꿈을 꽃피우는 도전에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에 “우리 아들 용감하다, 사랑한다”는 응원밖에 더 보탤 말이 없었다. 그 아들이 이제 주립대학 경영학 교수로 자리 잡고 가정을 꾸린다.

 

전통적으로 혼사(婚事)는 당사자인 신랑 신부나 그 친구들의 축제보다는 혼주인 부모의 하객들이 축하하는 사회적 관계의 마당이다. 한편, 부모의 장례는 자식이 상주(喪主)가 되고, 조문객은 자식들의 사회적 관계망 안의 사람들이다. 망자의 친구들이 조문을 꺼리는 것은 상례인데, 이들만 있고 자식의 조문객들이 적은 경우에는 자식을 대하는 눈초리가 썰렁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혼사에서는 신랑이 신혼집을 마련하고 신부가 살림살이를 준비하는 일이 부모의 몫이다. 풍속도 변하기 마련인지 부모에게 신세지기 싫다면서 젊은 그들 방식대로 혼례준비를 한다면서 부모는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유학시절에도 언제부터인가 학자금과 생활비를 장학금으로 충당한다며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견함이 앞섰으나, 유학비를 주면서 격려도 하고 당부도 하고 싶은 아비의 기쁨을 빼앗긴 섭섭함이 있었다. 이번 혼사에도 혼주는 끼어들 틈이 별로 없어 하릴 없이 계면쩍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


청첩장을 내는 일은 내 몫이다. 갑자기 청첩장을 덜렁 보내기 쑥스러워 공들여 만든 수목원 새해 책상달력을 보내면서 그 틈에 ‘모시는 글’을 끼워 넣었다. 10년 전 딸아이를 시집보내면서 박경리 시집 안에 ‘모시는 글’을 함께 보냈던 일도 기억이 새롭다. 



                               모십니다

 

새해 달력을 만들면서 한 해가 지나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간 강녕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에는 십 년이 다 되어가는 나남수목원 사계의 풍경사진으로 꾸몄습니다. 

보내드리는 달력의 하얀 공간에 좋은 기록들만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봄날이면 수목원의 아름다운 숲향기도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지훈) 혼사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아이는 미국 미시간대 박사를 마치고 지난 학기부터 캔자스주립대 경영학 교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2018년 1월 5일(금요일) 오후 1시,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혼배성사가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한 예쁜 딸(지현)을 며느리로 주시는 김준진·한향숙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새해 설계로 바쁘실 텐데 혹여 번거롭게 하는지 염려되오나, 

희망찬 미래로 행진할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는 날에 함께 뵐 수 있으면 저희들에게 큰 영광이겠습니다. 

                                                                                                  조상호·황옥순 드림 


보낼 사람을 선택하는 일은 그이들과의 인연을 되새겨 보는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친인척과 아들의 성장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축하객 일순위이다. 내 일처럼 반가울 것이다. 예전에 혼사를 챙겼던 사람들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모시는 글을 보낸다. 주고받으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가 생기는 편한 사람들이다. 몇 년 동안 며느릿감을 애써 소개했던 여러 분들에게는 그동안 고마웠고 이제 제 짝을 찾았다고 통보하는 마음으로 우정 청첩을 띄웠다. 잘 아는 사이 같지만 소식을 알려 결례가 되는지 멈칫거리게 되는 사람도 있다. 그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자신이 없는 어중간한 경우이다. 새삼스럽게 연을 맺어 갚아야 할 자연채무(自然債務)가 부담스러우면 건너뛰기도 했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무는 상부상조의 전통적 민간보험일 수도 있다. 축의금, 부조금은 준 대로 다시 받는다기보다도 열을 하면 넷 정도 되돌아오는 것 같다. 줄 때와 받을 때의 사회적 위치가 변하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은 넷을 주고 열을 기대하는 것 같다. 염량세태(炎涼世態)를 탓하며 섭섭한 속내를 감추지 못하지만 이기적인 자신의 욕심은 탓하지 않는다.


명동대성당에서 혼례를 치르기로 했다. 양가가 가톨릭 집안이라 편하게 결정했다. 수목원의 넓은 잔디밭에서 며느리를 맞는 숲속 혼인식을 꿈꾸기도 했다. 울창한 숲에서 산새소리의 축하공연이 함께하며 나무처럼 늠름하게 살자는 다짐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애비가 땀 흘려 마련한 녹색공간의 미래 주인공들이 아닌가. 빠듯한 대학강의 일정으로 꽃피는 봄날을 기다릴 수 없다니 어찌할 수 없다. 박선용 신부님이 집전한 혼배미사는 하느님의 축복을 아우라로 해서 경건했다. 미사시간 내내 오랜만에 속세를 떠난 깊은 산사(山寺)에서 갖는 성스러운 평화로움을 대성당 맨 앞자리에서 만끽했다. 아이들이 너무 귀하고 예뻤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저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상으로 비상(飛翔)할 것이다. 명동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후광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 세상잡사의 욕망을 핑계 삼은 냉담도 속죄해야 했다. 이제 조금은 느리게 깊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젊은이들이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살다 보면 소소한 갈등도 생길 것이다. 삼십 몇 년을 자기 세상에서 살았으니 세상을 보는 눈, 생활 습속이나 입맛까지도 다른 것이 있을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양보하며 참아내면서 서로 간의 공동접점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이 삶의 지혜임을 터득할 것이다. 이를 조율해 줄 어른 역할은 부모들보다 더 편하게 대해줄 박 신부님의 몫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미국으로 떠났다. 

 

마음이 바빠졌다. 죄송하게도 엄동설한의 대성당 광장에 줄을 세웠던 축하객들에게 예의표시를 해야 했다. 10년 전 딸아이의 혼사가 끝나고서 느꼈지만 혼인식 사진은 온통 저희들의 사진이지 혼주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수백 명의 하객들을 기억하지 못한 결례가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전속사진가를 내 뒤에 고정시켜 축하인사를 하는 하객들의 모습을 일일이 스냅사진에 담게 했다. 우선 스마트폰으로 몇 백 명의 환한 얼굴과 짧은 감사 글을 한 분 한 분 메시지로 보냈다. 좋은 뜻으로 덥석 시도했지만 눈은 침침하고 기기를 다루는 손놀림은 서툴렀다. 그래도 행복한 축제였다. 며칠 동안 여러 번 사진을 보고 또 보며 기분 좋은 상념이 오가는 정성이 배어난 뜻 깊은 시간이었다. 내 삶의 수호천사인 그분들에게 예를 갖춰 자연채무를 갚는 제1과 제1장의 시작이다.

 

 

 

이 글의 일부는 2018년 1월 25일 〈한국일보〉의 '삶과 문화' 칼럼에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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