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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교정에 영원한 스승 芝薰의 동상 세우고 싶다
매체명 : 고려대 교우회보   게재일 : 2003-08-05   조회수 : 9120

고려대 교우회보 | 2003. 8. 5.

 

모교 교정에 영원한 스승 芝薰의 동상 세우고 싶다 

 

 

이과 출신의 한 고등학생이 문학강연을 위해 내려온 조지훈 선생을 먼발치서 한번 쳐다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버렸다. 광주고에 재학 중이던 학생 조상호는 그렇게 부친의 소망이던 건축학 전공을 포기하고 미련 없이 고려대 법대로의 진학을 결행한다. 이때가 1970년이다.

그러나 많이 어둡고 뒤틀린 유신체제 직전의 혼탁한 시대상황은 지훈에 대한 사모심과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시골 촌놈(?)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는 문학지 대신 ‘찌라시’를 택한다. 대학 내 지하신문 〈한맥〉이다. 감시와 검열이 심한 고대 근처 인쇄소나 등사집을 피해 좀 떨어진 경희대 근처의 인쇄소에서 밤을 새워가며 만든, 그의 말을 빌리면 ‘아직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따끈따끈한 유인물’을 고려대생에 배포하는 맛에 살았다.

청계피복노조사건으로 어수선하던 1971년, 예의 ‘찌라시’는 경기도 광주 철거민단지의 소요사건을 기사화했고, 이는 유명한 고대 위수령의 발단이 된다. 학교에서 제적되고 강제징집되어 휴전선 철책에서 보초를 서다가 복학한 게 1976년. 고대 라이온스 클럽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6권짜리 《조지훈 전집》을 사서 책 앞장에 이렇게 쓴다. “라이온스의 힘을 입어 지훈의 품에 안기다”(이 대목에서 그는 라이온스 장학생으로 혜택을 받았는데, 이제는 고려라이온스클럽의 멤버가 되어 선배에게 받은 사랑을 후배에게 돌려주고 있다며 뿌듯해한다).

그는 그렇게 지훈에게로 돌아왔고 이런 그의 ‘지훈을 향한 짝사랑’은 외아들의 이름을 지훈(현재 모교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라 짓게 했고, 서초동에 자리 잡은 나남출판사의 사옥도 지훈빌딩이라 부르게 했으며, 2001년 드디어 그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芝薰賞을 만들게 했다.

그가 사재를 털어 제정한 지훈상은 문학상과 국학상 두 부문으로 나누어 최근에 간행된 저작물들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결정한다. 시상식은 매년 5월 지훈의 기일에 맞춰 행하는데, 수상자에게는 각각 5백만 원의 상금을 준다. ‘가장 고대적 출판인’으로 불리는 연유도 이 때문인 것 같다고 하자, “모교 교정에 고대의 영원한 스승인 지훈 선생의 동상 하나 세우지 못한 죄인”이라며 손사래부터 친다. 그 때문일까?

“거짓과 비겁함이 넘치는 오늘 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지훈전집의 광고카피도 직접 썼다.

그가 자주 쓰는 말로 자연채무(自然債務)라는 말이 있다. 법률적 강제적 효력은 없으나 양심에 비추어 빚진 느낌을 말하는 것 같다. 그는 고대에 입학한 이래 모교에, 또 우리 사회에 항상 마음속에 빚을 지고 살기에 이를 갚아야 한다는 채무의식이 있다고 한다. 며칠 전에 모교 법대에 2천만 원 상당의 도서를 기증한 일이나, 박경리 여사의 소설 무대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 개최되는 토지문학제에 매년 1천만 원씩 협찬하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런 채무의식 때문이리라.

“찌라시를 만들다가 제적되고 강집까지 당했으니, 말하자면 나남출판사는 불온한 빨갱이가 사장이구만요” 하고 농담을 했더니, “에이 빨갱이는 무섭잖아, 좀 낭만적인 빨치산으로 해 줘” 하고 한바탕의 웃음으로 되받는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듭니다”라는 나남의 모토처럼 그는 쉽게 팔리지 않더라도 오래 팔리는 책을 만들고 싶어 하고 또 만들어왔다.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나은 수십억의 순수익을 내는 큰 출판사의 사장이지만 그는 책의 기획단계에서 섭외, 교열까지 직접 사원들과 같이한다. 특히, 우리 문장에 끼어든 일제의 잔재, 외국어 번역투 문장의 청산에도 주력한다.

초대 이병완(신방 73), 2대 신계륜(법학 74) 편집장이 모두 참여정부의 핵심인사들인 것만 봐도 나남의 역량을 미루어 짐작게 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출판인은 도서목록으로 말한다”는 그의 소신처럼 1979년에 창간한 나남의 도서는 4년 전에 이미 5백 페이지를 넘는 두툼한 도서목록으로 나왔고, 해외에 지사까지 두고 있다.

중국의 한 유명인사가 선물했다는 붓글씨가 사옥 안에 걸려 있는 걸 보며 지훈빌딩을 나섰다. “나남이 작가의 요람임은 천하가 다 알고, 독자들의 호평이 해외까지 들린다”(作家搖籃天下知, 讀者淸音海外聞).

 

글 | 金鎭國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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