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이사장 에세이언론이 본 나남 조상호

자기높임을 위한 독서의 권리
매체명 : 말없음표 속의 속말들   게재일 : 2002-05-02   조회수 : 2191

말없음표 속의 속말들 | 1985, 나남, pp. 79∼88 전제

 

자기 높임을 위한 독서의 권리

 

 

한 장님이 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불시에 눈이 뜨였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이 밝고 보니, 이 장님 양반 눈앞에 훤히 펼쳐진 세상 한가운데서 어디가 어딘지 발길을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길을 묻는데, 이놈의 세상이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이오, 난 원래 앞을 못 보는 장님인데, 도중에 갑자기 눈이 밝고 보니 거꾸로 갈 길을 잃게 되었구료….

그러자 행인이 한참 딱한 눈길로 그 장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귀띔을 해 준 말인즉, 그런 일로 무얼 그리 낙담을 하시오. 그럼 다시 눈을 감고 가면 될 거 아니오. 옳거니! 그러자 이 장님 양반 무릎을 치며 다시 눈을 감고 손에 든 지팡이를 앞장세우고 가던 길을 유유히 되찾아 가더란다.

세상 살아가는 지혜나 책을 읽는 일과 상관하여 얼핏 떠오른 전래 우스개의 한 토막이다. 덧붙일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장님의 어둠 속에도 나름대로의 삶의 길은 있게 마련이요, 세상을 제대로 보고 밝히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 어둡고 좁은 삶의 길이 차라리 제격이리라는 소리일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삶의 길이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는 구구한 사족이 불필요하거니와 세상을 넓고 밝게 살아갈 지혜의 단서를 책을 읽는 데서 구해볼 수 있음은(독서가 적어도 그런 단서의 한 가지가 될 수 있음은) 더욱이 첨언이 불요할 것이다.

여기서 좀더 말을 덧붙이면, 그 책을 읽는 일의 폭과 지속성의 문제에 관해서다.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서 불가(佛家) 쪽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사류(古事類) 한 가지를 더 들어보자. 옛날 한 스님이 평생의 수도 끝에 도(道)를 깨치고 어느 날 마침내 세상을 제도(濟度)하러 산을 내려 왔다. 노승이 한 산 밑 정자에서 아픈 다리를 쉬고 앉아 있는데, 때마침 철부지 어린아이 하나가 스님 곁을 지나다가 무심결에 그만 그 스님의 도포 자락을 밟았다.

고결한 어른의 도포 자락을 버릇없이 밟고 지나가는 아이의 소행에 화가 치민 스님은 곁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칼을 빼앗아다 아이가 밟은 자신의 도포 자락을 북 찢어 잘라 내던져 버렸다. 하지만 아이는 스님이 제게 화를 내는 줄도 모르고 이번에는 그 할아버지 같은 스님의 목을 껴안으며 재롱을 부리고 덤벼들었다.

이에 이번에는 자기 목을 잘라 내던질 수도 없게 된 노승은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지혜가 모자름을 깨닫고 그 길로 다시 발길을 되돌려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고.

삶에 대해 딱딱하게 굳은 죽은 지식과 부드럽게 살아 숨 쉬는 지혜의 비김을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우리는 때로 주위에서 자신의 삶이나 세계의 이해를 일회적 완성(一回的 完成)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 독서에 대해서도 그것을 위한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방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 누구나가 실감하고 있듯이 우리의 시대는 눈부신 과학정보와 그에 대응할 인간정신의 계발ㆍ고양으로 무한정 넓은 미래세계에로의 문을 열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미래 속으로 무서운 속도로 변모해 나가는 인간의 모습과 삶의 양상을 나날이 새롭게 정의해 나간다. 그런데 그러한 과학정보와 정신활동의 성과들이 대개 책으로 담겨 나오고 있음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근대 과학정신의 금과옥조로 오랜 세월 동안 신봉되어 오던 유클리드 기하학과 뉴턴 물리학 체계가 어느새 우주구조의 기초를 설명하는 한 부분 법칙으로 전락하고, 영미지역을 풍미하고 있는 작금의 분석철학 이론이 전 인류가 힘겹게 쌓아 올려온 모든 철학사상 체계의 금자탑을 하루아침에 헛된 사상누각으로 타매하고 드는 현상들을 볼 때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떤 지경에 이르고 있는가를 실감하고 남는다(이는 물론 고건적 가치체계를 부인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연속성으로 인한 지식의 축적과 세계의 확대,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이해의 확대를 말하려 함이다).

우리의 삶이나 세계의 이해는 그 근본에서부터 '일회적으로 완성'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다시 체험되고 반성되면서 넓고 밝은 미래 속으로 확대ㆍ고양되어 나가야 하는 과정의 것이다. 그것을 그저 일정한 시기의 삶의 과업으로 이해하고, 일회적으로 완성지어 버리려 하는 것은, 변화와 전진의 격랑 속에서의 삶의 정지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시대 현실로부터 자신의 삶을 멀리 유리시켜 밝고 어둡고 딱딱한 아집 속에 그의 삶을 무용한 외곬의 그것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하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과 그 이해의 태도에 관련하여 노승의 일화의 의미를 다시 읽게 된다.

그것은 첫째 세상과 유리된 외곬의 산중공론(山中空論)의 무용함을, 둘째로는 우리의 삶의 이해나 체험은 일회적 완성이 불가능한 것임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다만 우리들의 삶에 무용하게 굳어진 외곬의 죽은(反) 지혜를 낳게 할 것이며, 그 외곬의 죽은(反) 지혜는 넓은 세상을 함께 숨 쉬는 산 지혜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용한 것인가를 잘 말해 준다.

이 외곬으로 굳어진 죽은 지혜는 그 지혜의 무용성만으로 허물이 모두 끝나지도 않는다. 세상과 유리되어 새로운 이해나 체험이 정지된 외곬의 삶은 필연적으로 정신의 경화현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이 그러하듯 단단하게 굳어진 정신의 암소(癌巢)는 그 독단과 아집으로 우리 정신의 정상적인 성장과 확대를 방해하고 그것의 균형을 깨뜨리는 파괴적인 결암현상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굳어 죽은 지혜는 이제 우리의 삶을 거꾸로 파괴하는 무서은 질병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둠에 익숙하여,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길을 잘 찾아가는 장님식의 삶은 다시 거론할 여지도 없으려니와, 여기서 그 책을 읽는 일에 상관해 말한다면, 때로는 얼마간의 독서량을 가진 사람에게도 같은 위험이 닥쳐올 경우가 있다. 바로 그 책 읽는 일을 너무 일찍 마감해 버리는 경우 말이다.

어느 시기, 얼마간의 독서체험으로 책을 졸업해 버리는 일, 그리하여 그 한 시절의 독서체험만으로 그의 삶의 이해를 완결짓는 일 역시 그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과거의 지식 속에 거꾸로 자신의 삶을 가두고(적어도 그가 그때까지 책에서 지속적으로 구하고 누려온 지혜의 폭만큼은) 고정시켜 두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의 삶의 정지와 경화현상을 가져올 위험 또한 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과거의 지식과 체험의 틀 속에 자신의 삶을 가두는 일은 그의 삶을 오히려 낡은 아집과 편협스런 독단의 노예로 만드는 일이며 그게 바로 정신의 결암현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그 정신이나 삶의 결암현상을 막아야만 한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의 삶에 대한 지고의 의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의무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 나갈 것인가. 어떻게 그 결암현상을 막아나갈 것인가.

여기에 다시 그 도통한 스님의 이야기에서 보인, 굳은 죽은 지식과 살아 있는 참 지혜의 문제가 걸린다. 그리고 다시 끊임없이 확대되고 고양되어 나가야 할 삶을 위한 독서의(또는 삶의 체험이나 이해의) 문제가 걸린다.

그 노승의 일화 속에 이미 우리의 삶의 지고한 의무로서 결암방지의 처방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야기의 표면적인 의미는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세상과 유리된 산중공론의 무용성과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나 체험의 일회적 완성의 불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그것들이 그저 죽은 지혜를 낳을 수 있을 뿐이라는 부정적 의미 이외에 보다 더 긍정적이고 원리적인 지혜의 본질에 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물론 서책이나 우리의 독서행위에 관련하여 긍정적인 시사가 직접 드러나 보이지는 않는다.

일화 속의 아이는 실상 지금까지 우리가 일컬어 온 바 넓고 깊은 삶의 체험이나 지속적인 독서 따위와는 관련을 지어 말할 수 있을 만한 처지가 못 된다. 여기엔 오히려 앞에서 말한 현실세계와 유리된 죽어 굳은 지혜로서의 외곬의 공론과 산중사유를 비꼬는 반독서적 야유기마저 엿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적어도 우리의 삶을 살아 있는 참 지혜의 문으로 인도해 갈 수 있는 소중한 단서를 한 가지는 간직하고 있다.

불가(佛家)의 고언(古諺)으로보다는 차라리 물과 갓난아기와 여자에게서 삶과 우주의 본성(本性)을 찾아보려고 한 노자(老子)를 떠올리게 하는 이 노승과 어린아이의 이야기는 바로 딱딱하게 죽어 굳은 지혜와 '부드럽게' 살아 움직이는 삶의 지혜를 너무도 적절하게 견주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화의 참뜻을 나는 감히 여기서 읽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저 노자가 낮고 약하고 부드러운 것의 역설적인 힘을 주장하고 그것의 표상으로서의 물과 여자와 갓난아이의 덕성을 내세웠듯이, 굳은 삶과 그 지혜에 대한 부드러운 삶과 그 지혜의 통쾌한 승리의 선언인 것이다(정신의 굳음, 그 결암현상은 그 자체가 이미 삶의 분명한 패배가 아닌가).

과연 그렇다. 지혜는 부드러워야 한다. 아니, 부드러움은 지혜의 근원이자, 그 부드러움 자체가 가장 강한 힘이 있는 지혜일 수 있는 것이다. 부드러움은 정녕 굳은 것을 풀어줄 수 있다.

부드러움의 지혜가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굳어 죽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고양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삶의 결암현상을 막을 길은 그 부드러움의 지혜로 우리 자신을 깨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드러움의 지혜는 어디에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물론 이에 대한 해답도 그 노승의 부정정인 일화 속에 이미 역설적으로 자답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에 대한 일회적인 완성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과 유리된 외곬의 공론과 아집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폭넓게 개방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일화는 일종의 반어법으로 그것을 우리에게 힘 있게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부드러운 삶의 지혜에 관련한 그 삶의 반복적인 고양 수단으로서의 독서의 역할이 드러난다.

그 부드러운 삶의 지혜로의 실천적인 방안은 독서가 매우 넓고 유효한 길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죽은 지혜의 굴레 속에 갇히지 않고 늘 새롭고 넓게 재창조되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독서의 참된 목표요, 그 궁극의 유용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전자는 다시 독서의 지속성의 문제로, 후자는 그 폭의 문제로 귀착하게 된다. 우리는 그 지속적이고 폭넓은 독서의 체험을 통하여 자신의 삶이 세상과 유리되어 혼자 외곬으로 생성이 정지된 채 거짓 완성되는 결암현상을 방지할 뿐 아니라 그것을 보다 부드러운 지혜 속에서 창조적으로 확대하고 고양시켜 나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지속성과 폭이란 말의 뜻을 보다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 다른 비유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자.

나는 자주 우리의 삶이 산을 오르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오고 있거니와, 또 그 산을 왜 오르느냐 하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등산인도 있었다. 그 산을 우리가 살아내야 할 삶의 표상이요, 삶 그 자체로 이해하고 보면 그 뜻은 더욱 분명해진다.

산이 있되, 그 산을 정상까지 오르는 삶도 있고 그것을 아예 오를 생각이 없이 낮은 평지에서만 지내는 사람도 있다. 혹은 산을 반쯤 오르다가 중도 하산을 해버리는 사람도 있다. 산을 오르고 오르지 않는 것은 애초 각자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에 관련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삶의) 산을 오른 일이 없다 하여 그에게 삶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장님의 어둠 속에도 나름대로 익숙한 삶의 길이 있었듯이 애써 산을 오르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삶의 길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산을 올라가 높고 높은 시야를 얻은 사람의 삶이 평생토록 낮은 평지 아래서 그 좁은 시야 속에 꼭꼭 갇혀 사는 사람의 그것과 같을 수는 절대로 없는 일이다.

산(그 산이 더욱이 우리의 삶의 표상일진대)을 오르지 않는 사람의 삶이 저열한 편견과 아집 속에 낮고 어둡고 딱딱하게 굳어진 외곬의 삶이라면, 산에 올라간 사람의 그것은 그 높고 넓은 시야 속에 자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나가는 부드러운 지혜의 삶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높고 넓어진 시선은 그 자체가 넓은 자유이자 자기 해방이며, 그 넓은 자유나 화창한 자기 해방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힘차고 행복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자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높고 넓은 시야를 얻기 위하여 우리가 삶의 산을 오르는 일은 그 삶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장님의 어둠 속의 삶을 수락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어둠 속에서 정신의 결암현상을 방치해 둘 수는 더욱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산을 올라 높고 넓은 시야를 얻어 우리의 삶이 그 자유와 해방의 부드러운 지혜 속에 안기게 될 때 우리는 그것으로 그 의무로부터도 자유롭게 해방되며, 그것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거듭 싱싱하고 자유롭고 부드러운 지혜의 봉우리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아직은 충분할 수가 없다. 책을 읽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삶의) 산을 오르는 바른 길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권의 책은 그 사람이 그것을 올라 본 체험과 지식의 기록일 뿐이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을 길잡이로 하여 어떤 봉우리를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길이 언제나 가장 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것이 그 산을 오르고 체험하는 모든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만이 산을 오르고 그 체험이나 산의 정보를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수많은 길들을 찾아 산을 올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의 정보와 체험의 기록들을 남겼을 것이다.

산을 오르는 데 한 가지 길에 만족하고 그것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역시 바로 우리의 삶을 외곬의 샛길로 몰아 가두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애초에 그 산을 오른 사람 자신의 길이요, 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상 저마다 각기 그 크기와 높이가 다른 자신의(삶의) 산을 점지받고 태어난 독자적인 삶의 주체이다. 남의 길을 따라 자신의 삶을 오를 수는 없는 일이다. 남의 길을 따라서는 기껏해야 남의 봉우리를 뒤따라 오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남의 길을 묻는 것은 그 길에의 매임이 아니라, 거기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어 자신의 산을 바르게 찾아 오르기 위함이다.

그 바른길,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낼 높고 넓고 부드러운 지혜의 봉우리에로의 자신의 산과 바른 길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의 산의 길잡이가 된 다른 사람들의 등산 기록을 일시적으로 그리고 다만 하나만의 등정기록에 붙매임이 없이, 끊임없이 그리고 폭넓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세계와 삶의 이해를 위한 연구와 체험의 기록들은 여러 가지 다른 학문과 예술 분야들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그것들은 서로 다른 자신의 길 속에 얼마나 다른 삶의 봉우리들을 실현해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나 또한 그 다른 길과 봉우리의 모습들로 하여금 서로의 봉우리가 높아지고 그것으로 마침내는 우리 인간 공동의 (삶의) 봉우리도 함께 얼마나 더욱 높여가고 있는가. 이것이 독서의 지속성과 폭에 관한 소리가 들먹여지고 있는 이유다.

우리가 삶의 결암현상을 방지해야 하는 것은 과연 우리의 삶에 대한 불가결의 의무이다. 따라서 그 결암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굳어 죽지 않는 부드러운 지혜로 우리의 시야를 높고 넓게 유지해 나가는 일 또한 우리들의 삶의 귀중한 의무이다.

아니 그것은 의무이기에 앞서 인간 본연의 자존심에 먼저 상관된 일이다. 사람은 원래 저열한 삶의 바닥을 싫어하고 스스로 높아지고 높아지기 위해 높은 곳을 오르려는 천부의 욕망을 지니고 태어난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인간된 이유겠지만 그 자존과 자존에의 본성은 저 바다 건너의 리처드 바크도 그의 갈매기 조나단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산을 오르는 일도 인간의 본성인 그 자존심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삶에 대한 의무임과 동시에 권리가 되어도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 산이 있으니 산을 오르노라는 등산가의 일갈도, 그 산을 오르는 일이 우리의 삶의 의무만이 아닌 권리의 행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산을 오르지 않는 것은 그 산을 오르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오를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이미 우리의 삶을 스스로 저열스럽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사람은 그 의무를 외면할때도 저열스러워지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스스로 버릴 때 그의 자존심도 함께 버리는 저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에 대해서도 아마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 책을 읽는 일 또한 우리의 삶에 대한 의무뿐 아니라 그 본성인 자존심과 관련한 귀중한 권리의 하나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 주위에선 그 소중한 권리를 너무 쉽게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말을 좀 심하게 비약하자면 책을 아예 멀리하고 지내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은 물론, 독서를 '취미'로 내세우는 사람도 그런 경우에 속할 수가 있으리라. 책을 읽는 일이 정신의 양식을 구하는 일일진대 육신의 양식을 구하는 밥 먹기를 취미로 내세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취미를 밥 먹기로 삼는 사람이야말로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귀한 자존심을 거론할 여지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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