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를 건너는 법 혹은 사막을 건너는 법
작성일 : 12.08.01   조회수 : 1652
지중해를 건너는 법 혹은 사막을 건너는 법

 

스페인 기행

몇 년 만에 작심하고 휴가를 강행했다. 8월 하순을 원초적인 태양이 작열하는 스페인에서 보내는 용기를 부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히트한 광고카피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아 울컥한 적도 여러 해 전의 일이다. 이 카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늦게 태어난 특권밖에 없는 젊은이들이 해외 배낭여행 러시를 부추겨 그들만의 세계화 잔치를 벌였다. 대학을 4년에 졸업하는 것이 비상식이 되고 해외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으로 한두 해를 더 보내는 것이 일상화된 듯하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의 낭만이나 사회진출의 스펙 쌓기라고는 하나 치열한 개인주의의 또 다른 포장술일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이 나라의 산업화, 민주화에 청춘을 바친 우리 60대들은 이를 뒷감당하면서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혀만 끌끌 찼다. 이제라도 다리에 힘 있을 때 세상 구경을 하자고 길을 나서야 했다. 국립박물관 고위과정의 늦깎이 학생인 아내의 학부형 자격으로 유럽미술 현장학습에 동참했다. 피카소ㆍ달리ㆍ미로ㆍ벨라스케스ㆍ고야ㆍ보쉬의 그림과 가우디의 예술건축이 공부대상이었다. 알량한 미술책에서 조악한 복사본 그림으로 예술의 허기를 달랬던 그 어렵던 시절을 보상받고 싶은 욕망이 가루 늦게 고개를 쳐들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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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공항 천장의 곡선 예술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 14시간의 비행 끝에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에 내렸다. 가우디의 곡선의 미학이 유감없이 발휘된 공항청사가 나를 반긴다. 여기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2시간 만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지중해를 고즈넉하게 안고 있는 카탈루냐 지방의 수도이자 스페인 제2의 도시로, 20년 전인 1992년 8월, 88서울올림픽 다음의 개최지였다. 이곳의 도심 중앙에 자리 잡은 몬주익 언덕을 가로지르며 마라톤 금메달을 향해 내뿜었던 황영조의 거친 숨결이 귀에 닿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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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성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사진 | Jordifer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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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내부는 가우디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성당의 드높은 열주는 나무가 하늘을 떠받드는 것 같아 더욱 경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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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구엘공원 동굴과 세라믹 모자이크로 수놓은 벤치. 이곳에 앉아보면 인체 공학을 배려해서인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빗물 빠지는 공간을 찾아보는 것은 작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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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의 카사밀라. 주거공간이 가게로 바뀌었다.



버스로 1시간을 달려 톱니 모양의 산을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중턱에 있는 몬세라트 수도원에 다다랐다. 가우디가 이 산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채석장ㆍ바다ㆍ산ㆍ사막을 연상케 하는 카사밀라, 돌기둥과 둥근 아치의 의 자연적인 동굴 같은 느낌을 주는 구엘 공원의 세라믹 모자이크의 향연이나, 150년째 짓고 있는 성가족 대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젖은 모래를 나타내는 종루(鐘樓)의 최상의 곡선과 아름다움을 둘러보면 아르누보 양식을 대표하는 그의 구불구불 신드롬과 함께 빈말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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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산정의 수도원 앞에서는 카탈루냐 분리독립을 외치는 집회가 있었다. 

이 카탈루냐 문장이 FC 바르셀로나 축구팀 유니폼에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마이산(馬耳山)을 닮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휘날리는 분리독립을 외치는 카탈루냐 문장이 황금 방패 위를 내려긋는 4개의 붉은 줄로 선명하다. 전통적인 스페인 투우의 광기가 그대로 축구로 옮겨 왔는지 축구열풍은 나라 전체를 뒤흔든다. 레알 마드리드와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긴 FC바르셀로나가 붙는 날이면 한일전 몇 배의 긴장과 환호가 터진다고 한다. 분리독립을 오랫동안 외치며 카탈루냐 문자도 따로 배우는 바르셀로나의 자존과 분노가 함께하기에 더욱 그러리라 싶다. 사실 서울에서 이곳까지의 직항편을 허용하지 않고 수도 마드리드를 거치게 하는 중앙정부의 심보도 알 만하다.


검은 성모상

이런 척박한 바위투성이의 돌산에 수도원을 건축한 그들의 신앙심이 경이로울 뿐이다. 이곳은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보존한 검은 성모상을 모시고 있다. 카탈루냐의 자존심이자 신앙의 결정체이지 싶다. 검은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이 영험한 성모상을 보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참배객의 줄이 끝이 없다. 튼튼한 유리관을 뚫고 봉긋하게 내민 성모 마리아의 오른손 손등은 수많은 기도의 화답처럼 반질반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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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세랏 성당. 이 안에 '검은 성모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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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조각상의 눈길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대성당 앞의 성모 조각상의 눈길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여러 각도에서 볼 때마다 눈길이 따라오고 표정이 변화한다. 1천 년 전의 작품인데 그들은 3D 화면 구성을 이미 터득했단 말인가. 허긴 1천5백 년 전에 지은 터키 소피아 성당의 벽에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눈길도 쳐다보는 사람을 계속 따라다녔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체험한 그림 속의 침대는 보는 위치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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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성모상. 참배하려면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오른손 손등은 수많은 기도에 화답한 듯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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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앞에는 카탈루냐 전통복장을 한 자원봉사자들이 기념사진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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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성모상을 알현하려 기다리는 긴 회랑 옆에 붙여놓은 여러 나라 말 중 한글 안내판이 반갑다.

 

 

달리미술관

 

프랑스와 가까운 한적한 피게레스까지 달려 어렵게 찾은 달리미술관은 지붕 위에 도열한 거대한 달걀과 황금색 사람들이 뜨거운 햇살과 바다 같은 하늘을 이고 우리를 맞는다. 이곳이 달리의 고향이고 작품의 산실이고 그리고 그의 무덤이다. 유감없이 발휘된 달리의 치밀한 사실주의와 눈속임기법과 그의 편집광적인 취미를 보면서 문득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세기에 현현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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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미술관은 그가 작업했던 공간이며 그가 묻힌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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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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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에서 바라보면 달리미술관 내부의 창문마다에 황금빛 사람 조각들이 손짓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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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작품을 큰 공간에 따로 떼어 배치하고 관람객이 직접 참여하여 완성하게 하는 체험의 공간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좁은 시각을 꾸짖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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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눈속임기법으로 탄생한 링컨의 대형 모자이크 얼굴이 반긴다.


 

프라도미술관


세계 3대 미술관인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된 벨라스케스 작품 〈시녀들〉을 볼 때도 그림 속에 그려 넣은 큰 캔버스 앞에 붓을 든 화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누가 객체인지 누가 주체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마리가리타 공주가 주인공인지 난쟁이 시녀가 주인공인지, 아니면 뒤편 거울에 투영된 왕 부처가 주인공인지 모르겠다. 피카소는 공부삼아 이 〈시녀들〉을 50여 장으로 나눠 그려볼 정도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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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가 나란히 진열되어 비교 감상의 기회도 주었으나 예술의 감동을 떠나 기실은 나체모델이 권력자의 애인이어서 고야가 살아남기 위해 다시 옷을 입혀 그려서 전시했다는 시시한 이야기가 뒤따른다. 동행한 큐레이터 조 박사가 한 그림 앞에 숨을 멈춘다. 보스의 〈쾌락의 뜰〉이다. 공부하면서도 풀리지 않았던 이 작품의 원본을 보고 싶어 그 먼 여정을 자원했다고 소녀처럼 들떴다. 그렇게 크지 않은 그림인데도 화면 전체에 기지가 넘치며 쾌락이라는 이름보다는 사람의 생과 사를 말하는 미술사에서 터닝포인트를 이룬 작품이라고 감동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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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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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은 마하〉

 


아들의 재능에 반해 그림을 관두었다는 피카소 아버지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정작 파리로 진출한 피카소가 실의에 빠져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칩거할 무렵 자주 드나들었다는 카페 〈4catz〉에서 차 한 잔의 추억을 같이했다. 여느 유럽의 골목길과 같이 마차 하나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에 검은 고양이 4마리가 그려진 간판이 앙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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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칩거하던 시절 출입했던 카페 〈4catz〉

 

 

피카소의 〈게르니카〉

 

외부에 엘리베이터를 덧붙여 국립병원을 개조한 레이나 소피아미술관은 피카소의 〈게르니카〉한 작품을 위한 미술관 같다. 예전에는 왕궁경비대가 경비를 섰고 해외전시가 불가능하다는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초대형 거작 앞에 숨이 막힌다. 피카소는 단기간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으로 파리에서 완성한 이 작품 하나로 모든 여성편력이나 그 자신의 콤플렉스를 잠재우고 스페인의 대표적 화가로 우뚝 선다. 스페인이 프랑스로부터 이 작품을 돌려받는 데는 프랑코 총독의 독재가 끝나고 5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1937년의 바스크 마을에서 일어났던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을 고발한 내용이다. 전쟁의 부조리와 인간의 무너진 자존심과 공포로 울부짖는 인간의 절규가 핏빛 색 하나 없이 검은색 회색톤만으로도 장엄하게 울림과 떨림을 전한다. 자세히 볼수록 칠흑 같은 검은색 속에 꿈틀거리는 모습은 또 무엇인지 모를 전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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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쉬의 〈쾌락의 뜰〉. 미술사의 터닝포인트를 이룬 작품이라고 한다. 팁으로, 3쪽 병풍처럼 제작된 작품에서 작자인 보쉬의 얼굴은 오른편 상단 중간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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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게르니카〉

 


해안가에 먼 이방인의 세계를 가리키며 하늘 높이 서 있는 콜럼버스 기념탑을 둘러보며 16세기 아직 대영제국이 그 세력이 떨치기 전의 해양강국의 면모를 실감한다. 콜럼버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고 기실은 인도라고 썰렁한 농담을 하면서, 누구의 표현처럼 “이끼가 숨어있는 푸른 바위의 냄새”가 나는 것은 요즘의 IMF 지원을 간청해야 하는 경제상황이 안쓰러운 제국의 후예들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형식적인 상징에 그치는 여느 나라와는 달리 지금도 현실정치의 핵을 이루는 스페인 왕의 위상 때문인지 20년 전 유럽연합(EU)의 결성 조인식이 스페인 왕궁의 화려한 집무실에서 열렸다. 그 역사적인 열기가 나무 하나 없이 넓디넓기만 한 대리석 광장에 내리꽂는 햇살에 지금 증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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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궁. 파란 하늘만이 눈에 부신 것이 아니다. 넓은 광장과 하얀 대리석의 왕궁이 바라보기만 해도 햇볕에 눈이 시리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유럽 사람들은 피레네 산맥 서편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을 유럽이라 부르지 않으려 한다. 이 지역이 800여 년 동안 가톨릭이 이슬람에게 지배당했던 트라우마 때문일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스페인 남부에는 가장 로마네스크한 성당과 가장 아라베스크한 예술이 혼재해 있다. 그 중심에 석류의 붉은색이 투영된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이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다.


바르셀로나에서 지중해를 끼고 서진(西進)하여 빠빠루나 성을 들렀다. 버스 안에서 친절한 해설자의 배려로 그 시대상황의 이해를 돕기 위해 2시간 동안 40여 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엘시드〉를 미리 감상했다. 지중해를 건너 침공한 이슬람 군대를 물리친 가톨릭 기사의 영웅담으로, 바로 지중해로 돌출된 천연요새인 이곳이 촬영지였다. 높은 성 위에서 손에 닿을 듯 투명한 블루의 푸른 물결부터 시퍼런 검은 물결의 수평선까지 좇다 보면 그 끝닿는 곳에 또 하나의 바다가 하늘의 이름으로 뜨거운 햇살을 쏟아내며 다시 나를 덮친다. 시간이 멈춘 그렇게 파란 진공 속에 황홀한 실종을 만끽하지만 휴양객들의 소음이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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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엘시드〉의 무대인 빠빠루나 성. 

성벽 아래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된 지중해 너머에는 녹색 공간과, 마르지 않는 샘을 찾아 긴 항해를 해야 하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들의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00여 개의 종탑이 있는 발렌시아에서 하루 묵고 그라나다까지는 버스로 7시간의 여정이다. 버스 안에서 가수 이상은의 스페인 기행 CD를 틀어 주지만 잘 편집된 화면과는 달리 직접 발품을 파는 현실은 그리 녹록치는 않다. 삶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는 시구를 되뇔 수밖에 없다. 사막이 초기단계에 저러했지 싶을 삭막한 풍경이 구름 한 점 없이 바다 같은 하늘에서 내리꽂는 햇살 앞에 알몸을 계속 드러낸다.


여행하다 보면 대개 보고 나면 그저 그러려니 하기 일쑤인 지방 특산명품을 구경하자며 동굴 속의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피곤한 나그네를 이끈다. 60여 명이 옛날 초등학교 의자를 다닥다닥 붙여 앉아 집시의 아련한 춤사위를 기대한다. 늙은 집시의 춤은 끼가 말라서인지 심드렁해진다. 세월의 연륜이 체감법칙으로 작용하는 분야도 있는가 보다. 작년에 갔던 터키의 벨리댄스의 열정이 생각나서인지도 모른다. 상쾌한 공간과 그윽한 분위기라는 보조장치가 부족하더라도, 관객이 어찌 받아들이든 내 혼자라도 무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열정이라도 있어야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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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 주변에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우는 대신 벽돌의 골을 깊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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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궁전과 초록의 궁전 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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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여름 궁전과 식물원

 


북아프리카의 이슬람세력이 지중해를 건넌 것은 종교전쟁보다는 사막을 건너 유럽대륙에서 푸른 숲과 물이 넘치는 오아시스를 찾으려는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브롤터 해협까지의 지중해 물길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항해가 얼마나 고단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3,100미터의 만년설이 뒤덮인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향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북진했음이 틀림없다. 그 산 아래 성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만년설이 녹아내린 헤닐강의 물길을 끊을 수 없는 천년성을 그리며 이슬람문명의 상징인 물의 궁전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사막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물의 호사를 누린다. 돌사자 입에서 솟는 분수만이 아니라 기하학적인 계산 끝에 나온 수로의 배치로 냉방의 혜택을 누리고, 관개수로의 정비로 농산물을 충당한다. 숲에 둘러싸인 여름궁전은 온통 분수와 꽃밭의 천국이다. 그들이 이 지상에 건설하여 알라에게 바칠 천국의 모습을 꿈꾸었던 것일까. 습기가 없는 기후의 특성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된 왕궁의 호사스러운, 정말 아라베스크한 예술에 이방인의 눈이 과분한 호사를 누리는 행운을 안기도 한다.


그들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발견의 대항해를 지휘하고 무적함대의 영광을 구현한 이사벨라 여왕에게 성을 내주고 다시 지중해를 넘어 북아프리카로 돌아가기까지 250년 동안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이슬람 예술의 결정체를 구가했다.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클래식 기타의 선율로도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함께 꿈꾸듯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톨레토 성당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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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남쪽 외곽의 톨레토 성당. 이곳이 가톨릭과 이슬람세력의 경계였는지도 모른다.

 

 

스페인을 떠나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마드리드 남쪽 고도(古都) 톨레토를 둘러본다. 6~7층 높이의 언덕을 현대식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면 펼쳐지는 웅장한 톨레토 대성당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거대한 성당이 많기로 유명한 스페인이라지만 우리 명동성당의 10배가 넘는 이 성당의 화려함에는 주눅이 들 정도가 아니라 없는 신심(信心)이라도 쌓일 것 같다. 건축물은 또 하나의 권력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이 성당 높이의 수만 배 멀리 있어야 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후예들의 모습이 환영(幻影)처럼 스치는 멀미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작열하는 그 지독한 햇살 탓으로만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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