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생태계를 위하여
이종환 회장의 삶
신록의 푸르름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가을 단풍의 장엄한 합창은 이미 봄부터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햇빛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속에서도 다른 생명들을 위한 배려가 숲을 이룬다. 큰 나무만이 홀로 독야청청할 수는 없다. 숲의 질서가 무너지면 산불이 자체 청소를 하기도 하고 인간의 난개발에는 자연재해라는 징벌을 주기도 한다. 질긴 생명력의 야생화는 현란한 색상과 짙은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불러 종족을 유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생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번창하여 숲마을의 기초를 이룬다. 들판의 꽃은 숲으로 들지 않고 숲속의 야생화는 들판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숲의 생태계는 우리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 생태계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지만 천사처럼 쓰겠다”
삼영화학의 창립자 관정(冠廷) 이종환 회장이 개인재산 8천억 원을 출연한 교육재단이 매년 150억 원의 장학사업을 지원한다는 뉴스는 신선한 충격이다. 속세의 인기 있다는 실용학문인 법대나 의대보다는 자연계 이공계의 기초과학을 집중지원하여 그 분야의 노벨상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혜안도 톺아 보인다. 우리도 빌 게이츠 같은 세계를 끌고 나갈 주인공을 갖고 싶다는 그의 실현 가능할 수 있는 찬란한 욕망에 박수를 보낸다. 2000년 6천억 원으로 시작한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은 지금도 국내 최대이지만 한두 해 안에 1조 원의 재단으로 확충하여 장학지원을 확대한다고 보도되었다. 최근에는 인재육성을 위한 기초 인프라로 서울대 도서관 신축에 6백억 원을 쾌척했다 한다.
이종환 회장의 기부로 새롭게 탄생한 서울대 도서관.
기존의 건물을 다치지 않고 증축한 아이디어는 건축디자인의 백미로 꼽힌다.
세계 무역대국 10위 안에 우뚝 선 이 나라 정부관리나 이제는 낡아빠진 대권을 쥐겠다고 부나방처럼 나서는 권력중독자들이 많이 부끄러워해야겠다. 정부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을 시민이 과감하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정부가 없는 시절에 창의문(倡義文)을 들고 나선 의병(義兵) 정신이 이러한가 싶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의 결정체로 면면히 이어왔는지도 모른다. 부패한 관군(官軍)의 한심한 작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민의 공복된 사람들이 더 겸손해야겠다.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선량한 관리자의 본분이 곧 권력을 위임한 시민의 뜻임을 재삼 확인할 때이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회계부정이나 기업의 부정부패로 검찰의 문 앞에 선 재벌그룹총수들을 자주 본다. 구속을 면하면 대(對)국민 사과와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재산의 사회환원의 일환으로 3천억, 5천억 원의 복지재단 장학재단을 약속한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하지만 그 재단이라도 이 사회의 낮은 곳에 충실히 임하는지도 모르겠다.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대표기업이며 세계적 기업을 꿈꾸는 그이들도 국민의 인내를 담보로 한 수출지원 금융만이 아니라 값싼 산업용 전기와 수천억 원의 R&D 지원자금이라는 우리 생태계의 뒷받침을 모른 척해서는 어릿광대짓에 불과할 것이다. 더욱 겸손할 일이다. 선대 창업자의 근면검소한 기풍을 다시 구현할 일이다.
“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지만 천사처럼 쓰겠다”는 이종환 회장은 체면치레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돈 쓰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아름다운 고집으로 오늘날의 교육재단을 만들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구두쇠로 보일 수 있다. 구순을 앞둔 이 회장이 숱한 해외여행에서 아직도 이코노미 좌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상생의 공동체를 위한 개방, 창조성, 공유, 혁신
빌 게이츠를 배출한 실리콘 밸리의 문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버닝맨(burning man)이라는 행사가 있다.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버닝맨이 열리는 블랙락 사막에서는 1주일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빌딩과 회의실이 설치된다. 이런 작업이 사막 한가운데서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행사 직후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예술가들과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 정열적인 음악가와 엔지니어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창의성과 머릿속에 들어 있던 야망을 불태우는 것이다. 1960년대에 시작된 히피문화가 기성체제에 대한 강한 도전이었다면, 버닝맨의 문화는 상생의 공동체를 위한 개방과 창조성, 자기조직, 공유, 그리고 혁신이라는 실리콘 밸리의 가장 중요한 문화와 그 맥이 닿아 있으며, 서로에게 셀 수 없을 정도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커졌다. 실리콘 밸리의 오픈소스 운동의 아이디어는 바로 버닝맨의 개방형 협업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산업생태계에만 국한시킬 일은 아니고 바로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가치가 주류로 형성되는 사람들의 생태계를 만들었으면 싶다. 이종환 회장의 선행이 너무 값져 보이는 늦은 봄날, 쏟아지는 빗속에서 건강한 숲의 생태계를 넘어서는 상생하는 상상의 생태계를 그려본다.
다산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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