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시대정신
작성일 : 12.01.03   조회수 : 1419

풍자와 시대정신

 

 

새해 2012년을 ‘2000+12’년이라고 쓰면 새천년을 맞이한 지 벌써 한 띠가 순행한 셈이다. 당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는 새천년의 가슴 설레던 그 날이 가까운 과거의 빛나던 삶이 되었는지는 자신이 없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왔다. 엊그제 동지를 지났으니 이제 주역의 일양내복(一陽來復)한 지뢰복(地雷復)괘의 동이이순행(動而以順行)처럼 시대와 인정에 순응하여 행동함으로써 매사가 순조롭게 발전하고 형통하였으면 한다.

2012년 새해는 흔히 ‘선거의 해’, ‘정치의 해’라고 불린다. 총선, 대선이 함께 치러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마침 2012년은 다산(茶山)의 탄신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치 지도자의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요구한 다산의 경세(經世)철학이 새삼 뇌리에 떠오른다.


유머러스한 풍자, 그 웃음 속에서 눈여겨볼 일들

딱히 ‘정치의 해’라고 해서는 아니지만 《역사소설 솔섬(松島)》이란 정치 풍자소설은 새해 벽두에 호쾌하게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과거에도 선거철에는 으레 당선자를 암시하는 삼국지 같은 정치소설이 나왔지만 이 소설은 그런 류와는 차원이 다른 ‘한국 현대사를 진하게 비튼’ 유쾌한 배반의 기쁨을 주었다.

민족에게 큰 꿈을,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지도자의 혜안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꼼꼼한 일상까지 헤아려야 하는 입법자이어야 할 정치가 오늘처럼 조롱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는가 싶다.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웠으면 정통소설가가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막소설의 칼을 뽑았을까. 가히 안정효의 대변신이다.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한 《하얀 전쟁》, 한국전쟁의 참극을 다룬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등 그동안의 무겁고 어두운 내용의 이야기를 벗어던지고 무제한의 상상력을 신명 나게 쏟아내 《솔섬》이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아무래도 풍자문학의 백미는 40년 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일 것이다. 문학이란 형식의 이 장시(長詩)가 독재자에게는 어떤 민주화 선언문이나 데모 대열보다 훨씬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유신을 획책하며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하던 무렵 독재자에게 날린 직격탄에 우리 대학생들은 환호작약했다. 물론 김 시인은 수감으로 이어지는 처절하고 기나긴 고행(苦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판소리 가락에 붙여 이 시를 암송하기도 했고 혼자 부르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이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겨울공화국에 민주화의 봉화를 피워 올리는 일이며 또한 옥중의 김 시인에게 조금은 덜 죄송할 것 같았다. 제도언론들은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입을 꼭 다물고 있었으니 그때의 매스미디어 수단이었던 등사판을 정보계 형사의 눈을 피해 밤을 새워 등사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적〉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리는 그들의 눈을 피해 〈오적〉 인쇄뭉치를 가슴에 품고 전국을 뛰어다녔던 일이 눈에 선하다.

나라가 세계 무역 10대국의 반열에 오르고 국민소득이 그때보다 20배 가까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그때의 5적이었던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들은 아직도 부정부패와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들이 소설가 안정효의 《솔섬》에 더욱 간교하고 세련되게 다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하다.


풍자는 그 시대의 사회상을 담은 자화상

현실 정치의 난맥상을 통렬하게 풍자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포복절도할 만큼의 재미와 통쾌함을 느꼈다. 한편으로 되돌아보면 코미디 같았던 지난날의 삶이 슬슬 부끄러워지기도 했고, 이런 체제의 일원일 수밖에 없었던 일그러진 자화상들이 유령처럼 맴돌았다. 다행인 것은 우리의 공동체를 위하여 한 수 위인 국민들이 정치가를 훈련시키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받았다. 이 정치풍자의 알레고리에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가상의 황송공화국 솔섬에 유배될 군상일 것이다.

소설가는 우리 현실이 오죽 답답했으면 뇌물을 받고서도 ‘떡값’이라고 우기는 정치인에게 그 값만큼의 떡을 먹여 죽이고, 뇌물을 받고서도 ‘담뱃값’이었다고 우기는 관리에겐 그 값만큼의 담배를 한입에 쑤셔 넣어 피우게 하고, 글을 표절하고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계 관행이라고 우기는 낯 두꺼운 지식인은 뜨거운 물로 낯가죽을 조금은 벗겨내는 형벌을 가하고 싶었을까. 그리고 여의도에서 솔섬으로 떼 지어 날아오는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정치철새들을 사냥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세계빈민에게 통조림으로 만들어 기부하고 싶어 할까.

3권짜리 장편소설을 밤새워 가며 독파했다. 풍자소설 부문에서 새로운 기원을 여는 대작(大作)으로 꼽을 만하다. ‘나꼼수’ 류의 글을 연상시키면서도 품격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청년층뿐만 아니라 중장년층 독자들에게서도 일독을 권한다. 판소리 명창이 폭포처럼 쏟아내는 사설처럼 경탄할 만한 숱한 조어(造語)들과 기상천외한 알레고리를 확인하면 소설의 재미와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

작가가 워낙 신나서 썼다는 느낌이 글에도 묻어 나와서 읽는 사람까지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게 만든다. 소설을 읽어가면서도 작가만이 소설을 써나가는 게 아니라 나도 이렇게 해볼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모쪼록 새해 정치판에서는 이전투구(泥田鬪狗) 대신에 국민대표를 뽑는 건강한 선거축제가 이뤄지기를 소망한다. 그들만의 권력쟁탈 놀이가 아니라 그들을 지도자로 함께해야 할 우리 공동체의 공동운명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역사소설 솔섬》은 유쾌한 정치언어를 제공해 축제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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