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후기를 먼저 읽는 독자를 위하여
소설가 이윤기가 떠난 지 벌써 한 해가 되었다. 추모집, 신화 속으로 떠난 이윤기를 그리며 ―
《봄날은 간다》를 읽었다.
처음 이윤기를 만난 건 1980년 여름, 서대문의 정병규 디자인 사무실에서였다. 출판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곳을 아지트 삼아 무슨 책을 기획해야 하는지 뜬구름 잡는 담론으로 소일하면서 우리의 출판스승 정병규의 홍성사 시절 무용담에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지금은 조선대 교수이자 호남의 선비로 활동하는 이종범의 베스트셀러를 부러워하기도 했고, 풀빛출판사를 차렸던 나병식과 바둑으로 불안을 달래기도 했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자행하던 계엄령 하 공포의 칼날이 번득이던 무렵이었다. 김대중 음모 사건으로 낚여 나 사장이 합동수사본부에 붙들려 갔다 20여 일 후에 나왔다. 나와 바둑을 두었다는 알리바이를 대면 고생이 덜했었는데 차마 나를 불 수 없었다고 해서 며칠 동안 몸보신을 시켜주기도 했다.
정병규는 후견인으로 고교 후배인 소설가 이윤기를 내게 소개해, 번역서 로빈 쿡의 《스핑크스》를 그해 11월에 출판하게 되었다. 초보운전의 미숙함 그대로 마케팅을 잘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으므로 이 책은 초판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그리스 로마 신화 같은 대작을 번역하여 번역은 반역이자 제2의 창작이라는 번역문학의 대가로 떠오르기 직전이었던 것 같다.
세상일이 그러하다고 하듯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한 꿈 많은 소설가에게도 발목을 붙잡는 생활의 곤궁한 때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가 보다. 두세 권 번역일을 하던 때 우리 소설의 번역일을 맡았던 모양이다. 생활의 방편으로 번역일에 매달리지만 여느 번역자와는 달리 소설 창작보다 더한 열정을 바치는 모습을 보였다. 소설 중에 도굴자들이 잠시 묵었던 이집트 테베의 한 호텔을 번역하는데 그곳을 여러 자료를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찾았노라고 기뻐하던 모습이 선하다.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이 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몇 날 며칠을 이집트 관련 자료를 뒤졌을 것이다.
편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 호텔의 정확한 이름을 그 고생을 하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 그이에겐 그렇게 중요했던 걸까.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불편하면 견디지 못하는 그이의 자존이었을 것이다. 그리해야 어느 작가가 “이름 모를 들풀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고 써놓은 것을 보고, “이름 없는 꽃이 어디 있느냐? 게으른 작가가 그 꽃 이름을 모를 뿐이지”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산을 찾을 때 나침반과 지도를 보며 동서남북을 알고 앞으로 헤쳐가야 할 지형과 등고선을 미리 머릿속에 넣어둔다. 새로운 책을 처음 접할 때도 대개 저자 서문을 먼저 읽어 이 책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저자의 열정이나 메시지를 파악한다. 번역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역자의 말을 먼저 읽어 번역자가 공들인 땀 냄새를 찾으며 안내를 받는다. 저자 서문은 책머리에 당당하게 실리지만, 역자의 말은 책 뒤에 부끄러운 듯이 숨기는 것이 그때의 관행이었다.
“역자 후기를 먼저 읽는 독자를 위하여”라는 이윤기의 상쾌한 배반의 글을 《스핑크스》 번역소설의 역자후기로 받았다. 그 첫머리는 “모든 것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었다”였다. 추리소설이었기에 이 역자후기는 퍼즐의 미로를 헤쳐나가는 보물찾기의 지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관행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역자 후기를 먼저 읽는 독자’라고 처음으로 불러줌으로써, 커닝하려다 들킨 것 같은 쑥스러운 마음을 백일하에 드러내 오히려 편하게 읽으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역자 후기를 먼저 읽는 독자를 위하여”라는 이윤기의 역자 후기가 계기가 되어, 이때부터 우리 출판사의 모든 번역책은 ‘역자 후기’가 아니라 ‘역자 서문’이라는 문패를 가지고 책의 맨 앞에 늠름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계면쩍다며 역자 후기를 고집하기도 했지만, 그런 자신감도 없는 번역은 왜 하느냐고 다그치며 ‘역자의 말’을 전면에 내세우기를 고집했다. 해서 그 책의 번역이 더 치밀하고 완성도가 높여질 수 있었으리라 자위해 본다. 이윤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실천한 지도 30년이 넘는다.
가는 길이 다르기도 했고, 30대 천방지축의 열정을 되새김질할만한 여유도 사치라고 할 만큼 바쁘다는 핑계로 소원하게 지내다가 3년 전 이청준 선생 상가에서 우연히 이윤기를 만났다. 검은 양복 차림으로 나타난 그를 보고 나는 내심 충격을 받고 말았다. 기골이 장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머리가 하얗게 변해 있었고, 몸이 무척 왜소해져 있었다. 왜 그렇게 몸이 안 좋아 보이냐고 하자, 그는 돌연 벌컥 화를 내더니 "여기 지금 상가 아니오? 그런데 그런 걸 뭐하러 얘기합니까?”라고 귀기서린 눈빛으로 치받았다. 죽음이 예감되는 어려운 병에 몹시 시달리고 있나 싶은 지레짐작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번 추모집에서 윤대녕 소설가의 글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이미 두 해 전에도 나오는 걸로 보아, 60 주변부터 몹쓸 병마에 시달렸던 것 같다.
“나는 나무를 심는다. 빈 땅에는 나무를 심는다. 나는 늙겠지만 나무는 자랄 것이다. 나는 내 값을 못할 만큼 늙어가겠지만 나무는 제값을 할 것이다.” 그가 말년에 양평에 살면서 나무를 심는 일에 심취하면서 남긴 말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인 그대로의 그의 기개가 나무로 환생하여 죽어 천년이라도 영원하길 빈다.
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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