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
작성일 : 09.08.04   조회수 : 2152

박경리 선생

 

 

원주 가는 길은 멀었다. 단구동 선생댁을 가기에는 2차선 영동고속도로에서 문막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국도를 타는 길이 빠르다. 1993년 봄 아내와 함께 《김약국의 딸들》 새 책도 보여드리고 인세도 드릴 겸 처음 인사드리러 길을 나섰다. 이후 항상 아내와 함께하는 원주 가는 길은 원주시 단구동에서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까지 이어지면서 15년을 넘는 장정으로 계속된다.


선생의 외동따님 김영주 누나 ― 우리는 김지하 형을 옆에서 지켜낸 그이를 이렇게 불렀다 ― 를 편하게 뵌 것은 1991년 김지하 형이 요양하며 몸을 추스르던 무렵 병문안 갔을 때였다. 그이는 이미 절판된 고려불교의 탱화를 연구한 책을 수정 증보하고 싶은데, 어렵게 구한 탱화 컬러사진이 많이 들어간 전문서적이라서 출판이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속내를 비쳤다. 나는 이 연구서적의 가치를 따져보기 전에 먼저 그이의 책을 출판해 주는 일 자체가 이 사회가 마땅히 해야 할 아주 작은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우리가 암울했던 1970, 1980년대의 불볕 사막을 건널 수 있도록 타는 목마름으로 지켜냈던 김지하 형을 누구보다도 가장 핍진(逼眞)하게 뒷받침하며, 동지 이상의 아내로서 그리고 핍박받는 아버지를 둔 형제의 어머니로서 고난의 이 행군에 가장 큰 짐을 지고 늠름하게 장정(長征)한 그이에게 이 사회가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나는 중견출판사 사장이 되어 있었다. 1992년 여름에 출판된 《신기론으로 본 한국미술사》가 그 책이며, 매스컴 전문출판사에 갑자기 미술사 책이 나온 연유였다. 이 책은 5년 뒤 일본에 있는 고려 탱화 자료를 찾아내고 조선시대를 보완하여 《한국미술사》로 거듭나게 된다.


이 무렵이었지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누나가 어머니의 뜻이라며 《김약국의 딸들》 출판을 권하는 전화를 했다. 어머니, 아! 《토지》의 작가 그 박경리 선생이구나. 외동따님의 책을 그렇게 호화스럽게 출판해준 사위의 후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다. 30년 전 베스트셀러였는데 방송국에서 드라마로 제작한다며 오늘 계약했는데 방송이 되면 다시 화제가 되지 않겠느냐고 벌써 출판사들이 출판계약을 하자고 모여든다고 했다.


뵙지도 못했지만 어른의 고마운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1993년 1월에 이 책을 출판하였다. 이렇게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15년의 씨줄과 날줄이 얽힌 찬란한 원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71년 가을 박정희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무렵 나는 학생운동의 주동자로 도망자 신세였다. 선배의 도움으로 검거를 피해 청량리 밤 기차로 원주에 실려 와 원주천변 넝마주이의 삶을 두 달 정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였다고 자위했지만, 아! 원주. 무슨 인연이 이러한가.

그때의 관행처럼 출판계약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보다 더 큰 약속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해도 언행일치(言行一致)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 출판사는 모든 책에 인지를 붙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시켜 드렸다. 인지를 붙여 확인하지 않으면 출판사가 판매부수를 속이지 않겠느냐는 불신의 시선이 못마땅해 인지첨부를 고집하는 저자의 책은 내지 않은 지도 제법 되었다. 출판이야 직업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 과정의 부딪치는 사람들과 삶의 무게를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겪어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앞날의 희망 속에 전력을 투구하며 같이 고민하고 의미를 찾기에도 힘이 부치는데, 상호 간에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는 저자와 출판사와의 관계를 맺기가 싫었다. 출판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 소설책 인지 붙이는 문제로 겪은 불쾌한 기억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인간신뢰에 대한 내 자존심을 무너뜨리면서까지 그 잘난 장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토지》가 장안의 인기를 차지하던 때였는데, 인지(印紙) 문제로 출판사와 저자가 불편한 관계가 되어 출판이 중단되어 있었다. 《태백산맥》의 경우는 법정에서 그 인지의 진위를 가리는 소송이 한참이었고 증인 진술을 위해 서초동 검찰청사에 가기도 했다. 인지에 붉은 도장을 찍는 행위가 자신의 작품에 낙관(落款) 찍는 기분의 선비의 품위가 이제는 작가의 재산을 검열하는 재산권의 표시로 정착된 것이다. 인지가 그런 유가증권이 되었다면 반품되어 폐기될 책에 붙어있던 인지를 새 책에 다시 붙여 사용한 것이 적법한가가 쟁점이었다. 물론 출판사가 승소하였는데 그것은 뉴스가 되지 못했다. 출판사가 갖는 문화의 열정과 지식산업 종사자의 엄격한 자기검열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고, 착한 상인이 갖는 기본적인 상도덕조차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정신적 가치의 문화가 돈으로 바뀌는 과정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혼란스러움과 함께 출판의 사회적 지위가 이 정도인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그 무렵 누나는 조심스럽게 출판이 중단된 어머니의 《토지》 출판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작가와 출판사의 관계가 많이 불편했던 저간의 사정은 김중배 〈동아일보〉 편집국장에게 보낸 문건을 보아서 이미 알고 있었다. 선생의 가슴앓이는 다음과 같은 서문에서도 나타난다.

오생근 형과 이 제안을 숙의했다. 형의 생각으로는 우리 출판사가 아직 여물지 못해서 이 큰 작품을 안기에는 아직은 부족하다고 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큰 감투를 쓰고 나남출판사가 토지출판사로 휘둘려 출판의 초심이 흔들려도 좋겠느냐는 위협성 충고 때문이 아니라, 정말 아쉽지만 아직은 부족한 자신의 역량을 되짚어 보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유소작위(有所作爲)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야 했다. 고마운 누나의 제안을 마음으로만 받고 마침 문학평론가가 사장인 솔출판사의 《토지》 출판에 행운을 빌었다. 나중에 또 《토지》 출판에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때는 내가 뒷감당을 해드리겠다고 누나에게 약속드렸다. 꼭 10년이 지나자 이 아름다운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베스트셀러가 될 대어를 낚았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고, 다만 선생의 고마운 뜻을 받들어 출간한 《김약국의 딸들》은 쉽게 팔리지 않았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장편소설이라는 명망만으로는 너무 오래된 소설이라거나, 읽을 사람은 다 읽었다는 속설을 뒤집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이 책표지와 본문 디자인을 자청해서 맡아 이제까지의 책 디자인 형식을 창조적으로 파괴한 감각적인 실험을 혼신의 열정으로 시도한 꿈 많은 디자이너 정유심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자신의 디자이너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부산 출신의 디자이너가 서울 중앙무대 진출을 위한 시금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갖는 애정 때문만이 아니겠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참신한 표지디자인은 그이의 대표적인 출세작이 되었다. 표지에 그린 나비 한 마리도 그렇다. 그이는 선생의 하관식 때 전라도 함평사람들이 통영까지 먼 길을 찾아와 선생의 영생을 그리며 나비를 함께 날렸던 예감을 그때 했던 것일까 하는 전율을 느꼈다. 그이는 이 나라 대표 디자이너가 된 지금도 우리 출판사의 ‘학술재단 번역총서’ 100권을 3년 동안 디자인을 맡아 고생을 자초하고, 중국의 명저 《홍루몽》 6권에 화사한 날개를 달아 출판의 격을 높여주는 우정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 서문이 없는 책이라서 ‘작가론’을 길게 붙이고 싶었다. 문학평론가의 글을 싣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이보다는 파격적으로 대작가의 큰 모습을 정답게 그려줄 필자를 찾았다. 3년 전 독일통일의 현장을 단둘이 다녀오면서 유럽의 방랑자로 세상의 눈을 뜨게 해준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김형국 사회학 박사의 유려한 긴 글 “변방에서 진실을 기리는 작가 박경리”가 그것이다. 마산사람인 그이는 동양의 나폴리라는 선생의 고향인 통영의 바다와 삶들을 그렇게 사랑했고, 선생이 강인한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원주사람이 되는 과정을 육친의 정으로 기록했다. 학계에서 사람 관계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이는 산적 같은 나를 어떤 점에서 예쁘게 보았던지 집안의 큰형님처럼 출판의 이모저모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지혜를 항상 챙겨주었다. 한국미래학회, 교육학의 태두 정범모 총장님,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의 권태준 선생, 《이팝나무 꽃그늘》의 김수학 선생의 많은 책들이 그이와의 우정의 산물들이다. 작년, 박 선생이 한산도가 바라보이는 통영바닷가에 묻히던 날에도 그이와 함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김약국의 딸들》이 진가를 발휘하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7월 말까지 8만 부가 팔려 “30년 만의 인기부활”이라는 〈동아일보〉 문화면의 톱뉴스가 되었다.

“비련의 늪에서 몸부림치는 한국 여인들의 한과 사랑!”,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통영의 고운 바닷빛, 노오란 유자, 붉은 동백꽃을 배경으로 민족적 정서를 그려낸다. 불륜을 의심받은 여인의 자결… 통영의 밤바다 바람 속에서는 김약국의 다섯 딸들의 숙명적 사랑과 배신, 죽음, 그리고 처절한 삶의 몸부림이 넘실댄다. 삼베처럼 질긴 한의 씨줄과 설움의 날줄은 비극의 천으로 김약국의 다섯 딸들을 옭아매는데….”

위와 같은 신문광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의 문장과 구성이 탄탄해서 과거에 쓰인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문학소녀 시절 이 작품을 읽었던 독자들이 이제 어머니가 되어 다시 딸들에게 권하는 등 대를 잇는 독서로 뿌리내렸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이들 어머니의 자존심도 살려주었던 것 같다. 자녀들에게 ‘책을 읽어라’고 채근하다가도 ‘무슨 책?’ 하면 말문이 막혔지만 이 책의 경우는 소싯적에 내가 읽었던 바로 그 책이므로 자신 있게 권했지 싶다.


그해 뜨거운 여름, 이제는 공원으로 바뀐 넓디넓은 여의도 광장에는 의사와 한의사들이 진료영역을 놓고 여러 날 열띤 대규모 집회의 공방을 벌였다. 우리의 주인공 ‘김약국’은 조선조 하급관리인 관(官) 약국의 의원으로서 의사와 한의사 어느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치열한 의사 한의사의 쟁투가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되면서 이 책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연말을 넘기면서는 30만 부를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세를 전달하러 한두 달에 한 번쯤 가던 원주행의 발길은 더욱 잦아졌다. 단구동 집에서 선생과 식사를 같이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하고, 텃밭의 채소들과도 친숙해지면서 작품 때문에 사람을 몹시 가린다는 선생의 말 상대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신의 성(城)을 지키기 위해 자초한 외로움이라고 하나 그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니었겠는가. 항상 아내와 동행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여인네들의 화제로 시작되었다가 집필 25년의 장정이 끝나가는 《토지》 이야기와 독서 이야기, 일본, 일본사람들, 지배계층의 못난 짓들, 그리고 생명, 환경 이야기들로 이어졌다. 저녁 늦게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매번 선생과의 대화가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노승과 나눈 듯한 어떤 화두가 되어 내 키가 조금씩 자라고 있는 듯한 행복한 시간이 계속된다.


또 인세를 가져왔느냐? 하며 반기면서도 《토지》 인세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항상 하셨다. 《토지》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팔리지 않고 오히려 《김약국의 딸들》이 자꾸 팔리는 것을 아쉬워했다. 망외의 수입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이번 인세는 환경운동에 써야겠다고도 했다. 항상 서너 시간의 대화에 담배 향기가 빠질 수는 없다. 선생은 애연가였다. 할머니의 심심초의 수준이 그것이다. 자연스럽게 담뱃불을 붙여드리며 나도 담배를 물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식 같은 녀석의 맞담배질이 보기 싫다면 그렇게 긴 시간을 말 상대해 드릴 수 없음을 선생도 알고서 양해하는 것 같았다. 팔자가 센 《토지》를 출판했던 출판사와의 껄끄러웠던 경험을 많이 말씀하셨지만 나는 선생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아 ‘지독한 사람이구먼’이라는 눈 흘김도 받았다. 동업자에 대한 예의에서가 아니라 내 직업인 출판의 사회적 지위를 담보하고 싶었고, 이런 얘기에 익숙하다 보면 주체가 바뀌어 나도 험담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약국의 딸들》은 대입 수능고사에 출제되기도 하면서 출간 2년 만에 40만 부를 넘긴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이 책 재판이 거듭되면서 출판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건방져졌음을 깨달았다. 회사 직원들만이 아니고 나도 그러했다. 이젠 아예 윤전기에 걸어 생신원가를 절약한 대량생산으로 재판을 찍어내려는 검토도 하고 있었다. 100만 부 돌파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들떠 있는 분위기에 작심하고 찬물을 끼얹어야 했다. 신문광고를 중단하고 자발적인 주문에 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부러 하는 이 책의 마케팅은 중단하고 그 힘으로 우리 출판사의 본래 영역인 인문 사회과학 책의 영업에 매진하라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의미가 크다지만 항상 춥고 배고프기 마련인 사회과학 출판사가 베스트셀러를 만들려고 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가보지 않는 길에 대한 동경이나 콤플렉스를 이제 접고 내가 선택한 길을 흔들리지 않고 늠름하게 갈 수 있는 자신감의 확인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는 거의가 3~4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 이 동네 풍속도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창업 10여 년이 지나 베스트셀러가 터졌기 때문에 그동안 전국서점에 깔렸던 미수금을 이 책의 수익만큼이나 회수하였음은 나만이 갖는 숨겨진 기쁨이었다. 이 책은 10년 동안 56만 부가 팔렸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가 다시 생각난다. 이런 내용으로 이해해 보자.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계절이라면 더욱 좋겠다. 하찮은 녀석이라고 말도 붙이지 않는 생쥐가 여우에게 “포도는 신가요?”라고 묻자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생쥐는 “그렇군요. 포도는 시군요” 하면서 알았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고 갔다. 그냥 지나쳤으면 그만일 텐데 그 녀석의 야릇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항상 우리들 위에 군림하는 당신이니까 허공에 걸린 포도 정도는 따먹을 만큼 점프도 잘할 터이니 포도는 시다고 알고 있군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우는 머리 위에 열린 실 수밖에 없는 포도를 따 먹기 위해 점프를 해보았으나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정작 실천해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우화의 내용이지만 조금 더 발전시켜 보자. 이 여우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밤중에 달밤에 체조하듯 부단히 연습하여 드디어 제힘으로 점프하여 포도를 따 먹을 수 있었다. 익히 알 듯이 과연 포도는 시었다. 생쥐를 불러 정작 포도를 따 먹어 보았더니 시더라고 말할 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으나 《김약국의 딸들》이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가 되고 나서의 내 느낌이 바로 이 여우가 된 심정이었다. 

1994년 8월 15일에는 《토지》가 완성된다. 나중에 우리 출판사의 '지훈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시사저널의 이문재 기자는 다음과 같이 그 감동을 표현하였다. 그해 가을에는 〈문화일보〉 사주였던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단구동 뜰에서 《토지》 완간 축하마당을 열어주었던 기억도 새롭다.

1969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25년, 《토지》에는 행방불명된 남편의 그늘, 암과의 투병, 시대의 압력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가족사 등이 담겨 있다. 또 저 25년에는, 운명에서 한(恨)의 미학(美學)으로, 문명에서 문화로, 거대한 역사에서 민초들의 자잘한 삶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는 생명론으로 진화를 거듭한 작가의 정신사 또한 고스란히 용해돼 있다.… ‘타협보다는 죽음을’이라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성격에서 《토지》는 태어났지만, 소설은 작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생명에 대한 연민’을 체득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정함’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작가정신을 그는 후배 문인들에게 물려 주고 싶어 한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정함이 없다면 문학과 예술은 불가능하다는 엄연함을. … 또한 《토지》는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그 핵심을 건드리면서 성큼 문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미래지향적인 한의 미학, 모든 생명은 생명으로서 평등하다는 생명론(生命論)은 한민족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적응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던져 놓고 있다.

그동안 도시개발에 밀려 철거될 뻔했던 단구동 집필실과 텃밭은 김형국 교수의 활약으로 원주시의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되어 벌써 역사의 공간이 된다. 선생은 단구동의 보상금과 함께 훨씬 많은 당신의 재산을 출연해서 설립한 토지문화관과 사저가 1998년 5월에 완공되었다. 연세대 매지리 캠퍼스를 지나 제천 넘어가기 전의 오봉산 자락의 명당자리에 깃든 것이다.

2001년 여름, 박경리 선생은 완간된 《토지》 출판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지 3년이나 되었다. 1998년 솔출판사에서 출판권을 반납함으로써 출판이 중단되자, 시중에서 이 책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 무렵 무슨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되었던 유명언론사 회장이 이 책을 읽고 싶다고 부탁해서 청계천 헌책방을 뒤져 어렵게 한 질을 구해 준 적도 있었다. 출판과정에 무언가 작가와 불편한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 책 집필을 위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가면서 사반세기의 대장정을 마친 터라 허탈한 진공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선생은 나남판 《토지》를 내면서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불편했던 심정을 드러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나는 《토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지겨웠고 부담스러운 짐을 부리고 싶었다. 심지어 '토지문화관'에 관해서도 소설과는 무관하며 ‘토지공사’에서 지었으니 토지라, 신경질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또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어느 특정한 작가나 작품의 몫이 전혀 아니며 예술가, 학문하는 분들이 활용하는, 다만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 해, 그러니까 토지를 끝낸 1994년 8월 15일, 그때도 나는 해방감,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멍청히 앉아 있었다.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고 막막했던 길 위에서, 폭풍이 몰고 간 세월이 끔찍하여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토지》의 운명도 기구했다. 25년 동안 여러 지면을 전전했고 4부까지 출간되었으나 3년 동안 출판정지, 절필한 일이 있었다. 완간된 뒤에도 출판계약이 끝나면서 3년간 책을 내지 않고 절판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거라며, 꾸지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세대에 속하고 편협한 나로서는 문학작품이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의 추세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인(商人)과 작가의 차이는 무엇이며 기술자와 작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차이가 없다면 결국 문학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의미를 상실한 문학, 맹목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책이 다시 나가게 되니 마음은 석연찮다. 자기연민이랄까, 자조적(自嘲的)이며 투항한 패잔병 같은 비애를 느낀다. 나는 왜 작가가 되었을까.

선생은 《토지》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도 했다. 3년의 공백 기간 동안 숱한 출판사가 《토지》 출판을 위해 토지문화관의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그때마다 선생은 이런 연유로 문고리를 다잡았을 것이다. “작품이 나간 이상 독자에게는 읽을 권리가 있고 이미 작가 손에서 떠난 것”이라는 설득도 지쳐갈 무렵이었다.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자연스럽게 내가 선택되는 것 같았다.


10년 전 《김약국의 딸들》을 출판할 때보다 대작가가 깃을 내릴 만한 문학의 숲이 많이 울창해져 있었다. 1996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사숙했던 조지훈 선생의 전집 9권을 출판하였다. 2001년에는 지훈 선생이 보여준 문학과 인생, 학문과 행동의 일치는 이 땅의 모든 지성인이 지켜야 할 삶의 지표임을 인식하고, 선생의 고결한 뜻을 계승하여 전통과 창조, 지식과 행동의 균형을 항상 새롭게 성취하기 위하여 '지훈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계간 〈사회비평〉과 〈포에지〉가 왕성하게 발간되었고, 하버마스와 미셸 푸코의 번역책이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무렵이었다. 이제는 《토지》를 출판하더라도 나남출판사가 토지출판사가 되지 않고 나남출판사 그대로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대학후배가 또 일을 저지른다는 문예출판사 전병석 사장님의 걱정스러운 응원 속에 여름 내내 《토지》에 관한 문학평론들은 모두 찾아내 혼자서 공부해야 했다. 워낙 큰 산이면 앞에 산이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나에게는 《토지》가 그랬다. 멀리서라도 산 정상을 보고 싶고 산기슭이 어떤지도 알고 싶어 완간된 《토지》를 세 번쯤 독파하며 출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남에서 이 책을 출판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토지》 애독자인 조 대표가 이 소설을 내기 위해 오랫동안 공을 들였다는 게 출판계의 후문이다”라는 기사에서 그동안 선생과는 이 책 출판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는데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비쳤나 보다. 말 많은 출판동네의 인심이 시기질투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사회비평〉을 창간할 때부터 수많은 이야기로 밤을 새우며 우정을 키웠던 송호근 교수가 장모되신 추은희 시인과 함께 춘천에서 원주를 넘나들며 선생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던 것도 나중에 알았다. 토지문화재단 이사까지 맡아가며 토지문화관 건립에 큰 힘을 보탠 김형국 교수의 나남지지 발언은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토지》가 나남에서 출간된다는 보도가 있고 나서 출판사는 의외의 방문객들로 붐볐다. 자칭 타칭의 문학평론가 교수들로 모두 박경리 문학과 《토지》 연구자들이라고 했고, 표지디자인의 고수들도 끼어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작품의 출판을 축하한다는 말은 건성인 듯 들렸고 자신들이 이 분야의 최고권위임을 자랑할 겸 나에게 인식시켜 주려는 모습이었다. 법과대학 출신인 만큼 문학동네를 잘 모를 것이니 자신들의 도움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암시도 주었다. 몇 달 전에 샅샅이 찾아 읽었던 그들의 《토지》 문학평론이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는 상당이 불편한 시간들이었다. 더욱이 실망한 것은 그들이 직업으로 삼는 문학평론인데 《토지》를 끝까지 전부 읽었다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박제(剝製)된 지성인이라는 모습에서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장면처럼 공들여 가꾼 파란 초원에 몰려드는 메뚜기떼들의 공습이 생각났다.

2001년 10월, 출판 계약서에는 “을은 본 저작물의 한국문학 및 문화사적 의의를 깊이 인식하여 가능한 한 품위 있는 서적의 제작과 유통을 하여야 하며”라고 자청해서 계약서에 들어갈 필요도 없는 문구를 명문화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스스로를 다짐했다. 계약당사자는 선생의 본명인 ‘박금이’가 표시되었고 입회인으로 최유찬 연세대 교수가 서명했다. 이 나라 최고의 대하소설의 대작가에 걸맞은 예우를 하기로 했다. 5년간 선인세로 그동안 《김약국의 딸들》의 판매수익을 전부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선생이 나에게 베풀어 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국민소설 《토지》를 발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선생도 혼신의 생애를 바친 《토지》이지만 시장에서 잘 팔릴지는 모르겠다며 철부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거액을 투자한 나를 오히려 걱정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런 계약이 이제까지처럼 인지 첨부 문제 때문에 겪는 불편함이나 사람의 신뢰에 대한 시험보다는 훨씬 속 시원한 결론이 되었다. 내가 힘들더라도 그 짐을 지고 헤쳐 나갈 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질시의 대상에서 잠시 제외해 주는 악어의 눈물만큼의 아량을 보인다는 사람 관계를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작가의 권위를 지킬 수 있고, 출판사 사장이나 편집자의 도덕성이나 자존심에 상처 날 일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을 양장본으로 결정했다. 번역책인 톨스토이 전집도 이미 하드커버로 권위 있게 출판되지 않았는가. 정말 그러고 싶었다. 우리 문학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박함에 유쾌한 배반을 하고 싶었고, 실질에 걸맞은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으면 싶었다. 형식을 파괴해서라도 척박한 출판시장에 돋보이는 이 책의 권위를 살려주고 싶었다. 우리도 이런 책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 속의 고급독자가 미소 짓는 모습도 그려보았다. 소설책을 양장본으로 출간하는 것을 반대하는 영업팀의 불만에는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귀를 막았다.

표지디자인과 본문디자인도 걱정이었다. 국민대 조형대학 윤호섭 교수를 찾았다. 벌써 25년 전에 ‘대우(大宇)달력’을 디자인하여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던 그이가 〈광고정보〉를 디자인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무렵은 그린디자인을 추구하면서 〈Everyday Earthday〉 기획전으로 동경까지 진출하는 등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데 여념 없는 독보적인 영역의 개척자였다. 이 책의 디자인을 부탁드리고 한 달이 지나 속 타는 마음으로 학교를 찾았다. 그이의 시각디자인과 연구실까지 가는 50m의 양쪽 복도는 온통 《토지》 표지디자인의 시안들로 도배된 감동 그 자체였다. 가지가지 아이디어가, 타이포가, 형형색깔로 군무(群舞)를 하는 또 하나의 예술이었으며, 그이의 이 프로젝트에 갖는 관심과 열정에 가슴이 뭉클했다. 열정적으로 사는 모습 그대로의 그이에게 처음 해보는 책 디자인을 무리하게 부탁한 것이 미안했다. 그이는 이미지를 찾기 위해 지난 한 달 동안 박경리 선생의 작품비평을 찾아내 모두 독파했다고 하며, 그분의 책을 디자인한 것이 영광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렇게 하여 기둥 서까래와 비슷한 토지의 타이포그래픽을 완성하고 각 장마다 세세하게 컷을 그려 주었으며, 인쇄소에서 가서 직접 컬러인쇄를 감독하여 그이가 만족할 때까지의 색 효과를 찾기도 했다. 책의 디자인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면서 21권의 《토지》 디자인은 또 하나의 격조 있는 명품이 되었다.


처음부터 책 디자인 값을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1억 원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이는 오히려 수줍게 손사래를 치며 우정의 산물이지 어떻게 작품의 값을 매길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가 내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윤호섭 교수의 작품활동을 돕겠다고 나서도 그이는 그냥 염화시중의 미소만 보낸다. 해마다 그이가 디자인한 작품, ‘토지달력’을 제작 배포한 것이 벌써 8년이 되었다. 디자인의 전과정에서 환경적이고 양방적인 디자인 방법을 채택하여 달력사용자가 최종적으로 디자인을 완성하는 직접 당사자가 되고 365일 달력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녹색공감을 전할 수 있는 시각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었다.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토지 달력’은 그 창의성 하나만으로도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되어 찬사를 받았고, 장안의 인기를 끌어 지금은 이 달력을 받겠다는 대기자가 3천 명을 넘는다.

본문 교정이 문제였다. 《토지》의 원본은 솔출판사의 책이 그 원고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시간을 벌기 위해 그 데이터를 구입하고자 했으나 출판사의 자존심으로 팔지 않겠다는 임양묵 사장의 아름다운 고집을 존중하기로 했다. 해서 200자 원고지 28,500장의 장대한 대하소설을 새 책으로 처음 완간하는 데는 첫 글자부터 입력을 시작해야 했고 교정을 보아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기존 책을 스캐닝하는 기술을 믿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순도 80%의 정확도라는 숫자의 마술은 한 페이지 860자에 오자가 20자가 가까웠으며 어떤 단락은 글자를 그림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처음부터 한 자 한 자 입력하는 수작업의 난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지만 글읽기의 피 말림도 만만치는 않은 일이었다.


100일 동안 내 젊음을 담보로 한 불철주야(不撤晝夜) 말 그대로의 오자(誤字)와의 전쟁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3교쯤 지나 남부 경상도 사투리가 제법 익숙해지자 《토지》의 거대한 산자락이 잡히기 시작했다. 문장의 전후관계로는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의 삼성출판사 판과, 1980년대의 지식산업사 판을 뒤져 한 단락이 빠졌거나, 한 문장이, 한 단어가 빠진 것을 찾아내는 희열로 출판사 사장이자, 주간이자, 편집자로서의 자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통의 축제의 나날들이었다.

24년간에 걸친 장기간에 집필된 대하소설이어선지 소제목들이 낯선 곳이 마음에 걸렸다. 스토리텔링의 독서 가이드로서 소설 본문에서 내용을 함축할 수 있는 작가의 다른 표현을 찾아내 바꾸고 싶었다. 밑줄을 긋고 싶은 선생의 문장과 문체 속에 흠뻑 빠지면서 아! 선생은 대시인이구나 하고 얼마나 감탄을 했던가. 11월 초 지리산의 열정을 닮은 최영욱 시인의 헌신으로 하동 평사리 최 참판 댁에서 토지문학제가 열렸다. 제1회 잔치여서 어렵게 이 자리에 참석한 박경리 선생에게 이 대작에 흠집을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과 함께 이 뜻을 말씀드리자 허락을 해주셨다. 방대한 소설 속에서 자신이 숨겨두었던 금빛단어들을 찾아낸 노력이 가상하다고 생각하셨거나, 아니면 이제 이 대작을 독자들에게 돌려드리려던 대작가의 무념무상의 초인(超人)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괴로운 환희’, ‘생명의 강, 생명의 불꽃’, ‘꿈속에 지신 밟던 사람들’, ‘거미줄로 그네뛰기’, ‘타는 목마름’, ‘진달래꽃 안개’, ‘금기의 사랑에 대한 도전’, ‘권위 뒤에 웅크린 고독’, ‘절망의 정열’, ‘거미줄에 묶인 사람들’, ‘빛 같은 어둠, 어둠 같은 빛’ 등 보물찾기는 계속되었다. 인용이 길기는 하지만 《토지》 판본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싶고, 내가 이 대작에 덧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분들은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로 다시 되돌려 보시라는 자료로 다음을 공개해 드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제1부 제1권] 

추적 → 한밤의 추적, 소식 → 별당아씨, 무녀 → 괴로운 환희, 구전(口傳) → 살아있는 전설, 습격 → 상처입은 울음, 하늘과 숲이 → 절망의 정열, 꿈 → 한 서린 꿈


[제1부 제2권]

추적 → 분노의 추적, 목기막에서 → 사람 사냥, 바람인가? → 탐욕의 밀회, 백의인들의 인식 → 그리움의 심연, 종말과 발아 → 생명의 강ㆍ생명의 불꽃, 늙은 보수파와 개화파 → 여인의 한ㆍ욕망, 나루터 → 자유를 위한 선택, 난리가 난다는 소문 → 선불맞힌 명포수, 농민들은 슬퍼하는 관객 → 폭풍전야, 달구지를 타고 오는 소년 → 어린 방랑자, 개나리를 꺾어 들고 → 생명의 불꽃, 사양의 만가 → 가난한 양반 의식, 습격 → 용이의 변신, 사형 → 공포의 그림자, 골목마다 사신이 → 할미꽃 한 움큼, 생과 사 → 살아남는 자와 죽는 자


[제1부 제3권]

주막에서 만난 늙은이 → 불행한 이성, 여론 → 흔들리는 민초들, 소동 → 애기씨가 어서 커야…, 당랑거철 격이라 하더니 → 우리 땅의 남의 전쟁, 주석 풍경 → 친일파, 걸인이 전한 말 → 별당아씨의 죽음, 대면 → 구천이 혹은 환이, 악은 악을 기피한다 → 악의 생리

[제2부 제1권] 

화재 → 용정촌의 대화재, 교사 송장환 → 간도의 민족학교, 꿈 → 꿈 속에 지신 밟던 날들, 가스집 → 서희의 자본 축적, 정호의 질문 → 무력한 지성들, 작은 새의 죽음 → 이율배반의 자비와 잔혹, 지난 얘기 → 선비와 도둑, 귀국 → 상현오라버니․신랑 길상이, 사진 → 욕망의 굴레, 바닷가에서 → 끝없는 추적, 임이네 작전 → 추잡한 인연, 정 떼고 가려고 → 질기고도 한 많은 인연, 노동자들 → 운명의 무게, 구만리 장천 날으는 새야 → 경건한 의식 또는 정념, 신발이란 발에 맞아야 → 용솟음치는 슬픔의 불길, 뜨내기꾼 → 타는 목마름, 목도리 → 야망은 불순물이다

[제2부 제2권] 

주구의 무리 → 밀정들,  밤에 일하는 사람들 → 지리산 사나이들,  나룻배 → 의병과 동학당,  산정장의 살인 → 식민지 젊은 그들,  귀향 → 봉순이․혹은 기생 기화,  쪼깐이집 → 가난 속에 움트는 봄,  홀어미와 기생 → 안타까운 희망,  정염 → 죽음보다 깊은 잠․진달래꽃 안개,  목도리를 두르고 온 여자 → 못난 사내 밀정,  해는 저물어가고 → 군자금,  집념은 그의 고독 → 위엄과 집념의 고독,  낭패한 주갑이 → 떠도는 자의 슬픔,  발병 → 주갑이의 돌베개 

[제2부 제3권]

폐가처럼 → 광기의 군상들, 밤길에서 → 남아장부로 살아남는다는 것, 면대 → 적과의 동침, 해관의 견문 → 절망의 정열, 하얼빈행 → 하얼빈에서의 결단, 최종 보고 → 되찾은 최 참판댁 토지, 사랑 → 여한이 없는 사랑․월선이!, 찾아온 사람 → 불륜의 허물을 벗는 날, 닮은 얼굴의 기억 → 핏줄의 비밀, 김두수 → 반역의 피

[제3부 제1권]

끈 떨어진 연 → 개화지식인의 고독, 전주행 → 여자의 울음소리, 별빛이 쏟아지는데 → 거미줄로 그네뛰기, 부녀 → 조준구의 몰락, 악랄한 처방 → 허기지고 고독한 승리, 백정은 예수도 믿을 수 없었다 → 세월을 자맥질하는 해녀, 친정에 와서 →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 옛터 → 다시 평사리에서, 용정행 → 독립자금과 운반책, 아버지의 망령 → 화려한 변신, 형제 → 공노인과 주갑이, 본정통에서 → 동경유학 여자동창들, 빗속을 → 욕망과 갈등의 자포자기, 오열 → 이래도 좋은가, 외투 입어! → 탐욕에는 사랑이 없다, 이향 → 덫에 걸린 짐승


[제3부 제2권] 

혼담 → 희망을 심는 사람들, 탈 속에는 → 타작마당의 검거선풍, 인간으로서 → 인간 이하의 고문, 혼례 → 홍이 장가가는 날, 태동기 → 붉은 구름바다, 동행 → 관동대지진의 비극, 오가다 지로 → 가시 면류관, 산호주 → 허물어져가는 것을 위하여, 노령의 빙판 → 사상의 열풍지대, 종놈의 아들 → 당신이 그곳에 남은 뜻을, 죄인들 → 젊음의 아픈 실수, 고백 → 도덕적 굴레의 고통, 돌아와서 → 지리산의 음모, 자살 → 광대같은 삶들, 군중심리 → 평사리 사람들, 뜨거운 모래 → 마지막 동학군 김환 장군, 환의 죽음 → 푸른 은빛 밤하늘의 붉은 구름바다, 사춘의 상처 → 순결한 젊은 그들, 내 땅에서 →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남기, 진실 → 인간의 목적, 아침 커피 → 이루지 못한 사랑, 수모 → 귀족과 신여성

[제3부 제3권]

마약의 심연 → 끈질긴 우수가 타는 눈, 판정패 → 무너지는 욕망, 풍류따라 → 마지막으로 부르는 적벽가, 왜 혼자 사는가 → 풍차 같이 도는 일상에서의 탈출, 살해 → 탐욕의 불씨, 잠든 것같이 → 진창 속의 연꽃, 거인인가 → 새로운 세계를 엿본 호기심, 손목 잡고 하는 말 → 인연의 고리, 마차를 기다리다가 → 구름처럼 강처럼, 주사 → 패배주의자의 비애, 호호야 → 연해주의 들개, 동승 → 미친 세월, 편지 → 계절의 마지막 사람, 지시 → 흔들리는 조직, 사랑 → 금기의 사랑에 대한 도전, 햇병아리 → 어머니의 빛깔

[제4부 제1권] 

삶의 형태 → 생존의 본능, 노상에서 → 핏줄의 배반,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 미처 못다 부른 노래, 귀향 → 확신할 수 없는 꿈, 찾아온 사람 → 강자의 논리, 신사 → 애정의 절제․술래잡기, 여옥을 전송하고 → 바람부는 벌판에서, 사랑이 아니어도 → 어설픈 광대의 무리, 독창회 → 거미줄에 묶인 사람들, 집념 → 보복의 정열, 번뇌 → 새로운 절망, 씨 뿌리는 사람 → 지리산 사람들, 성환어미의 후일담 → 다시 대륙으로, 남천택이란 사내 → 회색지대, 퇴역 장군 → 불꽃같은 여자, 진보적인 엄마 → 현장에선 이상주의자


[제4부 제2권]

생일잔치 → 한과 연민의 대속, 적요 → 존재의 신비, 어머니와 아들 → 어둠의 자식, 두 여자 → 이방인, 살아남으려면 → 회한의 회초리, 명희의 사막 → 비애가 아닌 생명의 한, 야무의 귀향 → 한의 여인들, 대면 → 진실이란 환상, 흥미로운 인물 → 국화와 칼, 부녀 → 산사람들의 혼인, 진주행 → 영원한 망명객, 선비와 농민․무사와 상인 → 남쪽 겨울 밤바다, 명희의 사막 → 자기기만의 의적, 휘의 갈등 → 치열한 기다림, 강도사건 → 응징과 실리


[제4부 제3권] 

인실의 자리 → 미래가 없는 인연, 동경의 인실 → 녹색의 여인, 영광의 부상 → 고독한 늑대, 영호네의 부탁 → 중매, 수유리에서 → 격동하는 국경분쟁, 양자 얘기 → 역사의 숲, 오누이의 재회 → 생명의 지향, 양현과 이부사댁 → 꽃구름 같던 시절, 서비스 공장 → 밀정의 변신, 동성반점에서 → 전운이 감도는 용정, 인실의 변신 → 분노의 세월, 노파가 된 임이 → 끈질긴 악연, 일본인의 시국관 → 전쟁의 광기

[제5부 제1권] 

신경의 달 → 불완전의 비애, 몽치의 꿈 → 자유인의 길, 해체 → 메마른 정열, 밀수 사건 → 한 많은 인연, 서울과 동경 → 관부연락선

[제5부 제2권] 

명정리 동백 → 쇳가루 같은 안개비, 황량한 옛터 →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하여, 소식 → 사상범 예비검속, 산행 → 빛 같은 어둠․어둠 같은 빛, 모화일가 → 인간의 원형, 적과 흑 → 사랑할 수 없는 불행

 
[제5부 제3권]

옛날의 금잔디 → 집념과 포기의 싸움, 순결과 고혈 → 그날이 오면, 만신은 홍엽이로되 →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독아 → 통곡하는 산하, 만리 길을 오가며 → 몰락하는 천황의 무리들


[제5부 제4권]

대결 →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 합류 → 지칠 줄 모르는 갈등, 산은 말이 없고 → 아름다운 영혼, 운수불길 → 마음의 눈으로, 졸업 → 진정한 분노

책 판형이나 본문 활자 크기만이 아니라 초판을 몇 질이나 출시하며, 초기 중기 광고전략까지를 수립하는 데는 이미 베스트셀러를 많이 성공시켜 본 열린책들 사장 홍지웅 대학후배가 내 일처럼 열정적으로 도와주었고, 동아제약 홍보상무였던 박상훈 시인의 도움이 너무 컸다.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하 장편소설이므로 등장인물을 쉽게 파악하여 독서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작지만 깐깐한 가이드북을 만들어 끼워주었다. 이상진 씨의 박사논문을 압축한 원고를 비싼 값에 사서 만든 《토지인물사전》이 그것이다.


우리 회사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전 21권의 《토지》 마케팅에서는 예전부터 시도하고 싶었던 사전예약제도를 실시했다. 10여 년 전 일본에서 보았던 너무나 부러운 제도였다. 얼마나 관행화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조사해 보지 않았지만, 고단샤에서 전 10권의 중국현대사를 준비하면서 1년 전부터 사전예약을 받고 있었다. 출판이 갖는 당당한 사회적 신뢰와 지위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부러움 때문이었다. 우리 출판사에 대한 신뢰라기보다는 대작가의 명성에 힘입어 500질이라는 대량의 사전예약을 받을 수 있었다. 믿음을 갖고 미리 책값을 선불하고 책을 몇 달 동안이나 기다려준 독자가 보내준 신뢰는 건강한 이 사회에 대한 나의 또 다른 믿음을 확인하게 했다.

2002년 1월 1일 자를 발행일로 하여 2001년 12월부터 발매를 시작한 《토지》 초판 5천 질은 신생아의 축복을 받으며 세상에 빛을 보자마자 오자(誤字)와의 전쟁에 무참하게 쓰러져야 했다. 읽고 또 읽고 다섯 번이나 교정을 보았지만 오자들은 교묘하게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눈 밝은 독자들의 질책을 통하여 나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고발했다. 아! 《토지》는 국민소설이었고 나는 선량한 관리자의 노릇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이 책들을 작두 칼로 모두 베어내고, 이제는 교정지가 아닌 책을 보며 오자를 이 잡듯이 뒤지며 완벽한 책을 다시 만드는 데 두 달을 꼬박 바쳤다.


서점에 출시된 책을 회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되돌려주시면 새 책으로 바꿔드린다고 전국 서점을 돌며 사정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다. 이런 도로(徒勞)가 출판의 정직성을 보인다고 거꾸로 선전이라도 한다지만, 나는 보도라도 될까 봐 숨죽이며 뛰어다니기도 힘들었다. 재판 5천 질은 이렇게 초판 5천 질의 무덤에서 피워 올린 서러운 꽃봉오리였고, 세상의 사막을 건너는 데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하는 다짐이 얼마나 자기합리화의 어릿광대짓인가를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토지》에 대한 애정만으로 자발적으로 새빨갛게 교정을 보아준 이름 모를 독자에게 무엇으로 갚아야 하는가의 고마운 마음만이 아니라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도 함께했다. 지금 나는 장엄하고 처절한 계절에서 세월을 자맥질하며 허기지고 고독한 승리를 찾아야 했다.


《토지》를 성공시켜야 한다는 일념뿐인데 계절의 감각을 느낄 사이가 있었을까. 고독한 황야의 늑대의 모습으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1년이 지나자 《토지》가 통산해서 50만 부를 넘어섰다. 자랑스러운 책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이 팔릴 책은 아닌데 그만하면 되었다고들 했다. 《토지》는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났고 다시 쳐다보기도 싫다고 이 책에 대한 애정을 거꾸로 표현하시던 선생도 얼마나 팔리는지가 궁금하셔 자꾸 묻곤 했다. “어느 정도는 팔려야 조 사장에게 미안하지 않을 텐데”라고 늘 걱정하시더니 이제는 안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한이 없는 월선의 사랑처럼 독자에 대한 믿음을 더욱 키워갔다.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세태 속에서도 그러나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21권의 장편소설이 파고들어 갈 희망의 고원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토지》 첫 장의 첫 부분을 국어 교과서에서 공부했던 세대들에게는 아직 고체화되지 않은 심성에 호소하여 생명의 강에서 생명의 불꽃을 태우기를 권유해야 했다. 미친 세월이었던 산업화시대를 물불을 안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 이제 조그만 소시민의 도시적 안락이라도 확보한 사람들에게 꼭 이렇게 사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근저에 숨어있던 정직한 휴머니즘에 호소하여 《토지》 한 질이라도 곁에 두면 정신적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거미줄로 만든 그네를 타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다.


서희를 위한 노래이거나 길상을 위한 눈물에만 그칠 수 없었다. “정녕, 세월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것 같을 것이며, 토지를 펼쳐보는 당신은 세상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카피라이터 박상훈은 시인 그 자체였다.


차디찬 물의 女子, 살을 지지는 불의 女子!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의 모습입니다.
어디 서희뿐입니까?
토지에 나오는 600여 명의 인물 누구 하나 무게없는 삶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제 인생이라거나 사랑을 품어 아파할 것 같으면
주저 없이 토지를 잡으십시오.
소외된 상처들을 만나고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가운데
당신은 어느새 영혼의 나이가 높다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괴로운 환희 속에 또 1년이 지난 2004년 5월은 회사 창립 25주년이 된다. 같은 기간이지만 25년을 ‘4반세기’로 표현하다 보면 한 세기 100년의 큰 도정에 서 있는 듯도 했다. 나나 무스쿠리의 고운 목소리도 더욱 감미롭게 와 닿았고, 기념식도 프레스센터에서 성대하게 치를 준비를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그보다는 기록문화를 담보하는 인쇄매체인 출판사답게 도서목록과 도서해제를 출판하기로 했다. 크라운판 크기로 2단 조판한 1,130여 쪽의 방대한 책이 되었다. 국내 최초라는 칭찬도 받기도 하고,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라지만 이 책 때문에 꼬박 6개월을 고생했다. 이 책의 이름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4반세기》이다. 이 책과 함께 2천 명 가까운 그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토지》 한 질씩을 선물로 보냈다. 나를 믿고 귀한 원고를 주었고 나의 성장만을 지켜주신 그들이 오늘의 주인공이어야 했다.


이 무렵 《토지》는 통산 100만 권 돌파를 기웃거렸다. 남들은 그렇게 많이 팔렸느냐고 놀랐던 박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을 출판한 지 10년 만의 경사였다. 이 책으로 1천여 권의 쉽게 팔리지 않는 사회과학 출판이 가능하게 한 물적 토대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토지》는 그 작품의 규모나 작가가 쏟아부은 혼신의 열정으로 문학계뿐만 아니라 출판계에도 워낙 많은 소문이 난 책이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설에 휘말리기에 십상이었는데도 이렇게 살아있는 전설로 유쾌한 배반을 한 것이 선생에게나 나에게도 그렇게 좋았다. 꿈의 밀리언셀러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푸른 은빛 밤하늘의 붉은 구름바다 위로 승천한 것이다. 마침 파주 출판도시에 새 사옥이자 마지막 사옥이 될 또 하나의 지훈빌딩의 역사(役事)를 마치고, 새로운 땅과 친해 보려고 숙식을 같이하며 지신(地神)밟기에 여념이 없었던 나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그해 겨울에는 SBS 텔레비전이 방송한 드라마 〈토지〉가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소설구조가 워낙 탄탄한 일제 치하의 휴먼드라마의 연속이기도 했지만 그 무렵 독도(獨島) 문제로 재연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크게 작용했지 싶다. 그것도 시대정신의 한 자락이라면 할 수 없지만 소설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고등계 형사 김두수가 주연만큼이나 과도하게 부각되기도 했다. 안방에서 편하게 컬러텔레비전의 드라마를 보지, 누가 불편하게 21권짜리 책을 보겠느냐며 이제는 《토지》도 팔릴 만큼 다 팔렸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우리 주변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의외의 결과라고 놀라며 자신의 왜소함에 부끄러워하거나 안도의 한숨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한다. 원전을 읽겠다는 이 약간은 불편한 작업에 동참한 새로운 독자들이 또 30만을 넘었다. 콘텐츠의 원소스멀티유즈의 성공사례라고 할 것이다. 소설은 텔레비전 드라마가 되고 이 방송드라마로 인하여 소설을 찾는 독자들이 계발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해 연초에는 이 드라마 제작진을 격려하기 위하여 친구인 SBS 김우광 제작사장과 함께 눈길을 달려 촬영지인 강원도 횡성을 찾았다. 횡성한우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고생하는 100여 명의 제작진과 동네 주민들까지 불러 작은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작년 5월, 임은 가셨다. 선생은 혼자서 병마를 숨긴 채 1년 동안 죽음을 디자인하셨다고 한다. 그야말로 국상(國喪)이었다. 작가가 갖는 사회적 지위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가슴 뿌듯함과 동시에 어쩌면 선생이 이런 국상의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안타까움도 같이 했다. 장례식을 준비하면서 영정으로 쓰일 선생의 사진을 만들어 드렸다. 어느 가을볕 아래 고추를 다듬고 있는 평화로운 선생의 한국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렇게 찾아보았지만 사진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토지》의 상징이 되어버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직접 선생을 조문하기 힘든 사람들은 《토지》를 소장하는 것으로 조의를 표시하는지 3~4년 잠잠하던 《토지》가 10여만 권이 돌풍처럼 움직였다.


통영포구에서 노제를 끝내고 장지를 향한 꽃상여 뒤를 따랐다. 만장(輓章)이 하늘을 덮고, 시민들의 애도 물결이 가시는 길을 자꾸 붙잡았다. 상장(喪章)을 다소곳이 달고 연도에 늘어선 여고생 중에서 젊은 박경리를 찾아보는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평사리의 나락이 익는 악양평야를 남도의 쪽빛 갯바람이 대신하는 듯했다. 문득 서희와 길상이, 용이와 월선이 등이 뒤따르는 《토지》의 윤 씨 부인의 상여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면 나는 토지 캐릭터 중에서 누구와 가까울까 생각하다가 어떤 평론가도 주목해 본 적이 없는 주갑이를 떠올렸다. 생전에 선생이 나를 보면 불현듯 주갑이가 생각나고, 당신이 창작했지만 주갑이가 가장 정이 가는 인물인데, 더 많이 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서만은 아니다.


49재는 선생의 뜻에 따라 백두대간 숲길 한 자락에 있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올렸다. 불현듯 이 고즈넉한 산사(山寺)에 북을 크게 두드리며 승무(僧舞)라도 추는 선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찰은 불교강원(講院)의 강사로 있던 지훈 선생이 스님들과 함께 해방의 그 날을 기다렸던 곳이기도 하다. 두 분 모두 내가 사숙(私淑)했거나 직접 모셨든지 큰 사랑의 의미를 남겨준 분들임이 틀림없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극락왕생을 빌었다. 별당아씨가, 월선이가, 그리고 서희가 진달래 꽃구름 속에서 손짓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아직도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있는데 여한이 없는 사랑을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으로 남긴 채 선생은 빛 속으로 그렇게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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