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출판인의 고백
작성일 : 02.05.03   조회수 : 2919

출판영업인협의회 강연 | 1991 

 

한 출판인의 고백

 

 

책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채찍질하던 우리의 엄한 아버지의 머릿속에 가졌던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란 곧 책을 가까이하고, 책을 열심히 읽고, 외우고, 생각하고, 시험답안을 잘 써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자식교육에 당신이 모든 것을 바쳐 학교를 보내는 것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 봉사하라는 더 큰 뜻보다는, 당신이 갖고 있던 콤플렉스를 자식에게서 다시 보상받기 위해 맹목적인 교육을 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의 책은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교과서와 참고서를 가리킴은 당연하지만, 우리가 경험했던 중고등학교 학생 시절부터 갖고 있는 책이란 개념은 출세할 수 있는 도구이자, 선망의 대상이며 넘어야 할 엄청난 커다란 장벽으로서 우리를 짓눌러 왔고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지금 우리 자식들이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부하라는 당부는 책을 보라는 채찍이었고 공부하기 싫다는 중압감은 우선 책에 대한 미움으로 시작했다.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은 철학이나 문학책 등 시험문제와 관련 없다는 쓸데없는 책은 읽어서는 안 되었고 가까스로 대학이라도 들어가면 이젠 또 다른 책에 대한 공포가 학생들을 덮친다.

부모들은 행여 그렇게 공들여 키운 자식들이 의식화되는 책을 읽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때의 책은 한 개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사상의 전달 매개로서의 핵폭탄으로 인식된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며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준비하지도 못한 채 걱정만 하고 있다.


책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것을 평생 업으로 하는 우리가 오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삶을 영위하는 데에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꼭 필요한 여러 요소 중 하나로서, 곧 삶의 일상성에 비추어 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까지 출판문화를 진선진미(盡善盡美)한 너무 놓은 곳에 올려놓은 것은 아닌지를 짚어보고 싶다.

이것은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일들이 쉽다거나 목숨을 걸고 이룩하고자 하는 출판문화를 낮추어 보자는 뜻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업(生業)을 저 높은 곳에 자리매김할수록 출판이 엘리트적인 문화사업이고, 서점은 지역 문화 선도자의 공간이라고 자위한 폭은 커질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감상적이 아닌 냉철한 자본의 논리와 격동하는 사회 구조의 재편성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부풀려진 허위의식 속에 안주하는 동안 우리 업계는 영세화로 치달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전통적인 문민 위주의 선비사상에 편승하고 88올림픽 이후 후기 산업사회이거나 정보화사회라고 부풀려진 풍선으로 비유되는 현실에서 우리도 덩달아 일상의 책장사 노릇을 과대평가해 왔는지도 모른다는 반성은 나 하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출판사와 저자와의 관계 시작은 우선 저작원고 그 자체이며 이것이 전부일 수도 있다. 시장성이 있는 원고이거나, 당장은 쉽게 팔릴 시장성이 부족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우수한 가치를 지닌 저작물인 것이다.


출판사가 찾고 있는 작품은 아무런 예고 없이 출판사에 들어온다는 천재들의 작품이다. 그러나 출판을 의뢰해 온 대부분의 원고는 저자 자신은 걸작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전혀 가망 없는 원고들이기 십상이다. 간혹은 자자 자신이 극명한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때도 잦다. 


"이 원고야말로 ○○ 분야에 없어서는 안 될 한국 최초의 중요한 연구서"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자자 자신이 저술을 위해 쏟은 노력에 의한 애정의 함축이지 이 책에 대한 그 분야의 객관적인 평가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동료 교수나 같은 분야의 연구저술가들 사이에 객관적이고도 엄격한 비평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전혀 책임질 필요도 없고 나중에 뒷소리라도 들을 리 없는, 점잖게 서로 등 두드려주는 동양적인 격려가 일반적인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단ㆍ학계의 객관적이고도 엄격한 서로에 대한 비평의 부재를 탓하기 이전에 우리의 지식인들에게 그러한 분위기 자체가 있는지도 사실은 의심스럽다. 

 

한편 이렇게 부탁해 오는 원고의 질은 대개 그다지 높지 않다. 천재의 징후를 발굴해 내는 경쟁의 출판사마다 너무 치열하므로 진정 장래성 있는 저자의 원고가 결국 어떤 출판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지나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따라서 저술 원고의 자체 평가는 그 책 원고가 전문적이고 항구적일수록 객관적인 비평의 대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출판사에서는 무조건 이를 받들어 모셔 책으로 출판하여야 할까? 자자 자신의 전공분야를 스스로 사명감을 갖고 알아서 평가해 주는 출판사가 존재해야 한다는 바람 때문인가? 학술 연구단체의 지원뿐만 아니라 각 대학 출판사에서도 외면하는 학술전공서적 원고들을 상업 출판사에서 떠받아야 할 만큼 출판사 사회적 지위가 튼튼한 것이 한국적 현실인가?

대학 출판사에서는 그 대학의 교양국어, 교양영어 중심으로 한 교과서를 독점 판매하는 수익이 막대할 뿐만 아니라 대학 재원의 예산이 있는데도 안 팔리는 좋은 책은 학술가치가 크다 해도 이를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지식인의 요람이자 대학의 사명을 구두선처럼 부르짖고 또한 지식계급의 우월함을 향유하고 있는 그들의 사회적 권위에 비추어 보면 큰 직무유기를 하는 셈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건강한 책임감을 방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정부나 사회학술지원 단체들로부터 상업성은 없으나 꼭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연구지원을 받아 책의 형태로 보고하는 경우에는 연구지원금에 출판비용 일부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연구의 중요성과 책 출판의 문화적 행위를 역설하여 일반 상업출판사에 인세까지 받아가며 이를 떠맡기는 것이 정상적인 출판행위라고 인식하고 있는 현실은 문화적 폭력을 넘어 사회 구성체의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의심케 한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학술적인 최초의 저서를 출판하는 데 손해를 각오하고 왜 투자를 하는가. 우선은 손해일지 모르나 장차로서는 그 저자의 잘 팔리는 다른 책으로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기대치와 함께 그 원고가 정말 좋은 원고라면 이런 좋은 책을 출판한다는 출판사 이미지 형성에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두분의 경우, 돈벌이가 될 만한 원고가 만들어지면 저자 자신에게 이제까지 투자한 출판사가 아닌 인간적인 관계라는 모호한 자기변명으로 다른 출판사로 가져가거나, 저자의 명성을 구축하도록 돕는 데 한 푼도 쓰지 않은 다른 출판사와 경쟁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게 하는 쓰디쓴 경험을 겪어야 한다.

저자가 수개월, 어쩌면 몇 년의 외롭고 집중적 노력 끝에 탈고한 저서와 저자의 특별하고 실로 어버이ㆍ자식 같은 관계를 깊이 읽어내는 출판인의 지혜는 소중하다. 그러나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 이 책을 읽어줄 일반 독자 대중은 어떠한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책의 독자는 어떤 사람들일 것인가를 치밀하게 분석해 보아야 하며 거기에 걸맞은 판매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독자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저술과정에서의 고통과 이기주의의 성취감에만 들떠 이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어리석은 독자의 책임이지 오직 숭고한 저술을 한 저자의 책임은 없다고 자위한다. 저술의 상업화가 이익을 향유하려 함에도 짐짓 독자성향이나 판매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오히려 이를 밝히는 출판사를 사농공상의 선비의식에서 장사치에 대한 경멸로 보기 일쑤이다. 자신을 저술의 상업화에 앞장서거나 문화로 위장된 철저한 장사치일 수는 없다는 데 그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다.

출판사의 이익이 생기는 유일한 원천은 도서의 제작비와 서점에서 지불하는 금액 사이의 차액이다. 제작원가로 책을 파는 것으로 이익을 얻을 수 없다. 그래도 어디 선가에 이익이 생기니 책 장사를 계속하겠지 라고 생각하는 저자가 참으로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출판 사업이란 인적 요소가 매우 강한 사업으로 바로 이 점이 이 사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인적 요소가 출판업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출판사 사장의 성향이 그 출판사의 목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또한 출판사 사장의 기호는 사업의 성격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질보다 양에 치중하고 출판업을 상업적인 모험사업으로 여기고 있는 베스트셀러 추종의 출판사가 이미 명성이 있는 베스트셀러 소설가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런 출판사는 남이 뿌린 씨를 중간에서 통째로 가로채기 위하여 애쓰기 마련이어서 경쟁 출판사의 저자를 움직여 자기 출판사에서 출판시키기 위해서는 비양심적인 수단을 가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저자는 방대한 출판목록을 필수품으로 여기고 있는 출판사보다도 저자의 작품에 대해서 인간적인 배려를 해 줄 수 있는 출판사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다.


인적 요소가 강한 출판사 본래의 속성 때문에 출판사로 들어온 원고를 되돌려 주는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출판 원고는 주로 상임ㆍ비상임 편집위원회에서 검토하게 된다. 계간지 등의 학술잡지를 같이 펴내는 출판사에서는 이 잡지 편집위원을 단행본 출판의 자문위원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원고를 검토하는 데에도 비용을 들여, 대개 한 달 동안 검토하여 이를 되돌려 주게 되면 이를 돌려받은 저자는 원고를 거절당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인격이나 자존심이 심하게 훼손된 것처럼 생각한다.

처음 원고를 부탁받을 때, 출판이 불가능하면 되돌려 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양해를 구하더라도 처음에는 그것을 흔쾌하게 받아들이지만 결국은 출판을 거절한 순간부터 저자에게 원수 취급을 받게 된다. 유아독존적인 선비ㆍ지사의 깊은 뜻이 좌절된 책임이 전체 사회구조에 있지 않고 오직 출판을 거절한 출판사의 사장 개인에게 덮어 씌워진다. 예상된 출판 거절의 분함을 이기지 못한 격정적인 저자는 다른 출판사를 찾아 출판 제작비용 모두를 자신이 부담하여 책 탄생 기쁨만을 허탈하게 즐겨 보기도 한다.

많은 직업 중에 왜 출판을 직업으로 선택하는가. 조선시대의 유교 집단주의의 영향으로 같은 장사라도 책장사를 한다는 것이 장사해서 돈을 벌고 한편으로는 사회 신분상승의 도구로 책장사를 이용해서 사농공상의 사회구조 중 가장 귀하다는 선비집단에 끼일 수 있다는 안심감에서인가. 저자의 원고를 처음으로 교정하고 대화를 통해 학문적ㆍ창조적 작업을 함께한다는 알량한 지적 만족감인가. 


왜 모든 책임만 있는 대로 떠맡고 온통 고통의 축제를 담임하는 출판쟁이가 되었을까. 좋은 책을 출판 못 하는 책임, 잘 팔리는 책을 출판 못 하는 책임, 원고료ㆍ인세를 많이 드리지 못하는 책임, 항상 가난한 책임…. 남들은 그러지 않고도 잘들 살아가는데, 출판질 하는 네가 뭐길래 시대의 소금이 될 것 같은 착각과 일류 저자들과 시대의 아픔을 교감한다는 대리 보상의 만족감을 즐기는가?

지금은 정보화시대라는 상품성으로 대중문화는 갈수록 넓어지고, 편한 것을 추구하게 되고 사회 전반을 선도하는 창조적 소수인 지성인들마저 좀더 넓은 평수의 쾌적한 주거환경과 많을수록 좋은 연구지원금과 함께 더 높은 존경심을 한 몸에 추구하면서도 도덕적이나 개인적 사회구성원으로서 역사의 철인으로서 어떻든 어떤 책임도 별로 지지 않는다. 학생은 공부 안 하고, 정치인은 썩었고, 출판사는 다 장사치들이 되어 좋은 책을 내려 해도 소금 같은 출판사가 없고, 젊은 놈들은 책을 읽지 않고, 언론도 보수 귀족이 되어 가고…. 나는 어떤 비판도 받아서는 안 되는 무풍지대의 고귀한 자리에 있고 너희들은…?

분단의 아픔이라는 냉전사상은 우리에게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생활화시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군사 문화가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행동양식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출판문화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직적으로는 맨 처음에 지적한 대로 책을 생활의 일상성에 뿌리 박지 못하고 엘리트 문화라는 허구 속에 올려놓음으로써 정부가 해야 되는 교육이라는 큰 제도를 민간 출판업자게는 그 일부를 늠름하게 담보하고 있다는 허위의식을 심게 되었다. 마치 서로를 낮추어보려는 옹고집들이 출판사와 서점을 적과 동지로 나누어보려는 일부의 생각도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벽을 뛰어넘는 공동광장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마련해야 되는 당위성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되었다. 출판사와 서점이 공동으로 이루는 신설된 공동체는 건전한 출판문화와 서로 협의하는 유통체계의 형성을 게이트키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상설기구가 되어야 하고, 주요 사업으로는 공동창고의 신설이나 도서상품권 회사의 설립 등을 추진할 수 있는 주체가 되도록 바로 이 자리에서 감히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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