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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외길 30년, 지식의 저수지를 갈무리하는 ‘의병장’
매체명 : Media + Future   게재일 : 2009-02-09   조회수 : 8083
Media + Future | 2009. 2. 9.

 

출판 외길 30년, 지식의 저수지를 갈무리하는 ‘의병장’


1979년, ‘나와 남이 어울려 사는 우리’라는 뜻을 지닌 나남출판사의 간판을 내걸고 30년이 흘렀다. 30년 동안 인문사회과학 출판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나남출판사의 조상호 대표이사는 권력에 안주하는 제도언론을 대신해 출판의 언론기능을 수행하고자 했고, 편견 없이 사상과 자유가 소통하는 열린 공간을 꿈꿨다. 낮은 데로 향한 30년만큼의 수심을 가진 지식의 저수지를 갈무리하고 있는 조 대표는 앞으로도 책을 만들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걸어갈 것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불황이었다는 1979년, 조상호 대표이사가 ‘나남’이라는 출판사의 간판을 내걸었을 때, 그를 아는 지인들은 한결같이 “어쩌자고…”라고 운을 떼며 혀를 차곤 했다. 그렇게 우려로 시작했던 나남출판사(이하 나남)가 5월이면 벌써 30주년, 갓 서른의 혈기왕성하던 청년 ‘조상호’는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해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나이로 이순(耳順)이라 불리는 60세를 맞았다.


지식의 저수지 30년, 낮은 데로 임하소서

“나남의 책은 쉽게 팔리지 않고 오래 팔린다는 캐치프레이즈에 숨어 ‘먹고살기 위해서’ 책을 만들어왔다”는 조 대표는 스스로를 ‘책장수’라고 호칭한다.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자랑하고, 좀 알아달라고 보채거나 거룩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나남의 책을 읽고 자아를 깨우치고 가야 할 길을 찾아가는 이들을 위해 책을 만들고 파는‘책장수’이고 싶기 때문이다.


“저에게 먹고산다는 건,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일상을 객관화하는 겁니다. 지식이나 이론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이나 이론을 실천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객관화할 수 없으니까요.”


나와 함께 숨 쉬고 살아가는 이들, 그 호칭이 ‘독자’이고 ‘소비자’이고 ‘수용자’이고 ‘시청자’이기도 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증명하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먹고산다’는 의미다. 이처럼 먹고사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유능한 출판가, 마케터, 편성기획자, PD, 기자 등 분야별 전문가인 것이다.


“제적, 강제징집 등으로 격동기의 대학 시절을 보내고 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범위의 민주주의를 하고 싶었습니다. 출판을 통해 어떤 권력에도 꺾이지 않고 한국사회의 밑바닥에 뜨거운 들불처럼 흐르는 힘의 주체를 그려보고자 했고, 권력에 안주하는 제도언론을 대신해 출판의 언론기능을 수행하며 출판저널리즘을 꽃피우고자 했습니다.”


나남의 책 중 유난히 ‘미디어’, ‘언론’, ‘커뮤니케이션’ 관련 도서가 많은 이유다. 조 대표는 나남이 아무 편견 없이 사상과 자유가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길 꿈꿨다. 그래서 제일 처음 만든 도서목록의 제호도 ‘지성의 열풍지대’. 조금 다른 사상과 의견이 거세게 일고 격렬하게 부딪치는 곳, 그곳이 바로 나남의 초심이자 순탄치만은 않았던 조 대표의 젊은 날의 자화상이다.


“나남은 물론 책장수인 조상호 역시 ‘지식의 저수지’였으면 합니다. 저수지는 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의 맨 아래 위치하며 오가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키죠. 사람들은 그 저수지가 얼마나 됐는지, 얼마나 깊은지를 따지지 않고 마른 목을 축이곤 합니다. 자정작용을 통해 깨끗함을 유지하고 낮은 데로 임한 30년이라는 세월만큼 깊어진 수심의 저수지이기를 바랍니다.”


‘나남은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의 성지순례지다’ ‘나남에서 책이 나오지 않으면 신문방송학과의 커리큘럼을 짤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니, 그의 바람대로 ‘출판쟁이’로서 조상호 대표는 분명 지식의 저수지다.


책이 ‘빌 게이츠’를 만들다

세계적인 기업가인 빌 게이츠의 창조적 발상이나 아이디어는 책 속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곱 살의 빌 게이츠는 백과사전을 독파했고, 유명한 사람들의 전기를 읽었고 공상과학 소설을 읽었다. 빌 게이츠의 주 종목인 컴퓨터 프로그래밍 역시 책 속에서 깨우쳤다고 알려진다. 윈도 및 각종 OS로 성공가도를 달릴 때도, 경영전선에서 물러난 현재도 빌 게이츠는 시애틀 인근의 후드 커낼 소재의 별장에서 ‘생각 주간’(Think Week)을 가지며 독서와 사색을 통해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빌 게이츠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컴퓨터보다 책을 먼저 사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콘텐츠 소비를 위한 유통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가장 유용한 도구는 여전히 글쓰기와 읽기이기 때문이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콘텐츠가 디지털의 상징인 ‘컴퓨터의 황제’ 빌 게이츠를 만든 셈이죠. 이처럼 책은 모든 콘텐츠의 원천이 됩니다. 콘텐츠 발전을 이야기할 때 원 소스 멀티 유즈를 주창하지만, 멀티 유즈만 노릴 뿐 소스를 만들려 하지 않는 것이 한국 콘텐츠산업의 고질병입니다. 소설가는 10명인데 평론가가 100명인 것과 다르지 않죠.”


주객이 전도된 콘텐츠산업의 현실에 조 대표는 ‘콩나물시루론’을 조언한다. 콩나물시루의 바닥에 재를 깔고 콩알을 뿌린 후 물을 주면, 주는 대로 시루 바닥의 구멍으로 빠져나가 버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콩나물이 자라고, 잘라내도 끊임없이 자라는 것처럼 콘텐츠 정책도 마찬가지다.


“삼성영상사업단이 700억 원이라는 거대자금을 투자하고 정책적 지원의 혜택도 받았지만 결국은 투자금만 날리고 문을 닫았죠. 하지만 그때 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투자금으로 자란 콩나물이 오늘 날〈대장금〉이 됐고 〈태극기 휘날리며〉가 된 겁니다. 그게 바로 콘텐츠의 속성이고, 국가가 해야 할 콘텐츠 진흥정책이죠.”


좀 더디더라도, 조 대표는 지금까지처럼 나남문학선을 내고, 박경리의 《토지》를 내고, 《조지훈 전집》 등을 내는 것으로 콘텐츠 육성에 동참하고자 한다. 언젠가 콩나물로 자랄 콩을 뿌리는 것이다. 나남이 출판시장의 침체에도 끊임없이 다른 출판사보다 많은 책을 출간하는 이유다.


“제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서 나남의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을 바꾸거나 스스로를 깨우쳤다면 그것이 ‘출판쟁이’에겐 가장 성공적인 콘텐츠 육성전략인 셈이죠.”

 


私淑 조지훈과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

조상호 대표가 ‘승무’, ‘주도유단’, ‘채근담’ 등으로 알려진 시인이자 수필가인 지훈 조동탁(芝薰 趙東卓)을 사숙(私淑)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 시절 장학금을 받아 조지훈 전집을 사는 데 헌납(?)했고, 외아들의 이름도, 사옥의 이름도 ‘지훈’이라 짓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9권의 《조지훈 전집》을 출간했고 사재를 털어 ‘지훈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광주고 재학시절, 문학강연을 듣기 위해 조 대표의 모교를 찾아 먼발치에서 바라본 것이 조지훈 선생과의 인연의 전부다.


“〈주홍글씨〉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이 만년에 쓴 단편소설 ‘큰바위 얼굴’을 보면, 훌륭한 사람을 상징하는 큰 바위 얼굴을 닮으려 애쓰며 살다 보니 스스로가 큰 바위 얼굴이었잖아요. 조지훈 선생은 바로 그런, 저의 큰 바위 얼굴입니다.”


‘거짓과 비겁함이 넘치는 오늘, 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조지훈 전집》의 광고카피는 조 대표의 자작으로, 선비의 지조를 말하고 실천하는 지행(知行)일치의 상징인 조지훈에 성심을 다하는 조 대표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출판신조를 나남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조 대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닮고 싶은 큰 바위 얼굴 조지훈, 민중노래 강연ㆍ대학생 토론대회ㆍ도쿄 외곽의 좁은 다다미방 등에서 만나 조 대표의 성장 과정을 지켜준 김지하, 리영희, 김중배, 김준엽 총장, 일면식도 없는 작은 출판사의 책을 교재로 선정해준 소흥렬 교수, 신정부의 구둣발에도 차 한 잔을 대접하던 이영희 교수, 〈김약국의 딸들〉, 〈토지〉 등의 姑 박경리 선생, 광릉 숲 자락에서 같은 마을 사람으로 사는 오택섭 교수. “머리와 가슴과 다리를 총동원해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조 대표를 평한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 나남의 초대 편집장 이병완, 신계륜 그리고 나남을 거쳐 간 2천여 명의 많은 저자와 나남의 책을 읽는 수많은 독자들 등 조 대표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조 대표가 걸어온 외길 인생이 외롭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 길에서 만났던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때문이다.


“책을 만들어 세상에 펴내는 일은 땅을 경작하는 농부의 마음입니다. 손가락 같은 묘목을 심고 정성을 다해 물을 줘가며 울창한 지성의 숲을 꿈꿨죠. 장마철 폭우로 속성수를 심어야 했고, 넝쿨 걷어내기와 잡초 뽑기 전쟁을 치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출판은 여전히 가슴 뿌듯하고 기쁨이 넘치는 길입니다.”


나와 남, 저자와 독자, 이들을 이어주는 세상을 향한 창인 책, 이를 만드는 것이 나남과 조 대표가 여전히 걸어야 할 길이다.


‘의병장’을 꿈꾸고, 조금씩 실천하며

역사의 뒤안길에는 시대의 한 자락을 밟고 간 의병들이 있었다. 국가 위기나 갈등상황이 닥칠 때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던 건 관군이 아닌 의병이었다. 큰소리도, 자랑도 하지 못하고 나라와 신념을 위해 쓰러져간 의병들, 그들은 진정한 역사와 사회 발전의 주인공이었다.


“의병은 그 시대의 역동이에요. 의병들은 모여 창의문을 낭독하고, 싸우다 죽어 나가기도 합니다. 의병은 내 아비일 수도, 내 오라비일 수도, 그리고 나 자신일 수도 있어요. 예전에는 농민이었고, 독립군이었다면 IT 붐이 일던 시기에는 구로동 디지털 단지의 간이침대에서 쓰러져간 개발자, 기획자, 프로그래머 등이 의병이었죠.”


조 대표는 최근 융합현상으로 치열해지고 복잡해진 미디어 격동기의 의병은 ‘콘텐츠’라고 설정한다. IPTV든, DMB든, 인터넷 미디어든, 그 산업을 진흥시키고 차별시키는 것이 바로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콘텐츠에 대한 중요성을 먼저 깨우치고, 먼저 움직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하는 의병이 많아야만 미디어 산업은 물론,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


“의병장은 의병들의 정신적ㆍ도덕적ㆍ물질적 지주에요. 언론과 출판계의 의병장이 될 겁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임명되지 않았고 법적 강제력도 없지만 저 스스로가 설정한 자연채무를 갚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 겁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죠. 이는 한국사회를 인식해가는 작은 기록이며 일탈하고픈 자기 입증의 궤적일지도 모릅니다.”


30년 동안, 셀 수 없는 상을 탔지만 조 대표가 가장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2005년 가을에 수상한 제37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이다.


“나는 정부가 인정하는 문화예술인이야”라고 성심으로 뿌듯해하는 조 대표는 1971년, 강제징집돼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의 병적기록부에는 ‘ASP’(Anti-government Student Power)라는 도장이 찍혔다. 그런 조 대표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주는 문화예술상을 받은 것이다. “의병장이 훈장을 받았다”고 한 조 대표는 상금으로 받은 1천만 원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조직위원회에 헌납했다.


미완성이 아름다운 이유

2천 권을 훌쩍 넘기는 인문사회과학ㆍ언론학 책을 출판해 온 30년 세월이 조상호 대표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30년 동안, 해놓은 일도 별로 없고, 아직은 갈 길이 구만리입니다. 출판을 기다리는 책들이 줄을 서 있고, 8회를 맞은 지훈상의 ‘문학상’, ‘국학상’ 외에 ‘언론상’도 제정하고 싶고…. 살려면 끝을 내려 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10년, 20년, 30년의 시점에서 삶을 정리하고 뒤돌아보기보다는 항상 미완성인 채로 현재를 이어가는 거죠. 책, 더 나아가 콘텐츠는 정신적인 산물이에요. 조금 더디기도 하고, 합리적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저는 앞으로도 계속 책을 내고,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과 소통할 겁니다.”


그는 지난 1월, 《대기자 김중배 신문기자 10년》을 출판해 격동기를 가로지른 정직한 언론인의 글과 삶을 통해 시대를 재조명하려 했다. 이는 조 대표 스스로의 표현대로 ‘똑바로 자라지도 못한 굽은 나무’로서 스스로가 정한 자연채무 중 하나를 갚은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모습, 언론과 언론을 통한 사회비평이 지향해야 할 규범적 기대지평이 무엇인지를 고찰하고 싶었다.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미완성으로 여운을 남기는 삶을 살고 싶다는 조상호 대표는 여전히 의병장으로, 꽤 오래도록 출판이라는 외길을 걸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소리 없이 쓰러져간 의병처럼,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ㆍ도덕적ㆍ물질적 지주인 의병장처럼 말이다.


조상호 趙相浩

출생
1950년 10월 18일

학력
1970~1976년 고려대 법과대학 법학과
1987~1989년 연세대 행정대학원 언론홍보 석사
1991~1997년 한양대 신문방송학 박사

경력
1979년 5월~현재 도서출판 나남 창립, 대표이사
1988년~현재 계간 〈사회비평〉 발행인
1995년~현재 (주)현대출판유통 대표이사
1997년~현재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강사
1999~2000년 한국언론학회 이사
2001년~현재 지훈상 상임운영위원
2005년~현재 서강대 언론대학원 강사
2006~2007년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 위원

수상
1988년 제8회 한국방송광고대상 공로상
1989년 책의 날 문화공보부장관 표창
1989년 제12회 한국출판학회상
1993년 제20회 한국광고인 대상
2001년 10월 제12회 간행물윤리상(출판제작 부문)
2005년 10월 제37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문화 부문)

저서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1999년, 나남)

글 | 허미선 기자 hurlkie@mfi.re.kr
사진 | 김선태 기자 nemo@mf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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