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을 부모님께 바치다
작성일 : 22.08.09   조회수 : 268

2021년 3월 13일(토요일), 수목원 일을 마치고 광릉집으로 넘어오려는데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동생 혜영이의 전화를 받았다. 밤 10시 일산 행신역에서 아내와 함께 KTX를 탔다. 새벽 0시 20분 죽음을 넘나드는 적막의 광주 병원 중환자실을 찾았다. 의식이 없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는 92년 동안 소풍 왔던 지구에서 마지막 보는 얼굴이리라. 마지막 불꽃이 돌아와 유언이 있거나, 눈을 맞추며 마지막 손을 잡아보는 이별의 의식을 치르는 임종이 아니었다. 한두 번 무심코 초점 없는 눈을 뜨는 것이 전부였다. 엄중한 코로나 팬데믹의 전쟁과 같은 비상상황에서도 어머니를 뵐 자리를 만들어준 밤샘근무에 지친 앳된 간호사의 배려에 고마워해야 했다.

 

31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내 품에서 산소호흡기로 인사불성의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스쳤다. 강인한 의지로 버텨온 거인의 마지막은 카리스마 넘치는 아우라는 어디 간 곳 없고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한 번 정신이 돌아와 무슨 말씀이라도 하실까 싶어 체온이 싸늘하게 식어지기까지 서너 시간을 품에 안고 혼잣말로 안타깝게 아버지에게 말을 거는 일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이 임종을 맞았던 기억이다.

 

이제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망연히 서 있는 일이 고작이다. 뜬금없이 중학생 때였던가 잠이 많아 ‘또자’라는 별명까지 있던 어머니가 꼭두새벽에 눈을 비비고 어린 자식에게 밥을 해먹이고 광주 가는 버스를 놓칠까 봐 함께 뛰던 40 초반의 씩씩했던 모습이 스친다. 이삼 년 전 어버이날이던가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전남대 부속 요양병원 뒤뜰에서 판소리 〈사랑가를 호기롭게 부르시던 소리도 귓가에 맴돈다. 우연히 스마트폰에 녹음된 소리공부를 오래 하신 ‘어머니의 목소리’를 찾은 행운에 감사하며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게 했다. 

 

의사는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다. 지난 9년간 요양병원에서 잠깐씩 엄습하던 치매가 중증으로 치달아 이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어머니를 고통 없이 보내드리려 얼마 동안을 더 지켜보자는 말에는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운명하시기를 기다리자는 말로 이해되었다. 자연사自然死의 길은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이 그냥 지켜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감 속에 쓸쓸할 수밖에 없는 일인가.

 

동생들은 어머니를 포천 수목원에 모시자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장흥 유치면有治面 대리大里 선산에 계신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함께 이장하자고 했다. 15년 전 남도의 상수도 취수원으로 장흥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선산 입구가 물속에 잠겼다. 산 뒷길을 넘어 성묘해야 하는 불편은 물론이거니와 산소를 돌보는 동생들도 이제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으니 그 고충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31년 전 중복과 말복 사이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장흥 고향에서는 마지막이 되었던, 만장挽章 행렬이 길게 늘어진 아버지의 화려한 꽃상여를 메고 산길을 올랐던 그 길은 호수 속에 잠긴 지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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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선산은 아버지가 장흥에 터를 잡으며 일제강점기에 징용 갔던 형님이 사할린에서 돌아오지 못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평생을 오직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가난을 이겨내신 10대 소년 아버지의 처절한 자신만의 고독이 승화한 성역에 다름 아니었다. 1978년 전북 고창에서 할아버지를 모셔왔다. 내가 결혼하고 첫 번째 치른 큰일이었으니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 큰며느리 맞기를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1985년에는 5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이곳으로 이장하시고 부모님을 기리는 큰 비석까지 세우셨다. 그리고 평생의 숙제를 마친 안도감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리고 부모님을 모신 아랫단에는 스스로 당신의 가묘假墓까지 대리석으로 마련했다고 흡족해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가계를 이끌며 아플 시간도 없이 근면한 강인함으로 병치레야 했지만 이제 회갑을 넘었는데 유택幽宅을 미리 마련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당신이 스스로 계획한 대단원의 마지막이었지 싶다. 5년 후에 아버지는 그 유택에 영면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유택을 미리 마련하신 아버지는 8남매 자식들도 함께하고 싶어 석축으로 아랫단에 자리를 마련해 두셨다. 두세 해 뒤 서울올림픽 해에 대우건설에 다니던 36살 청춘 동생 상대相大가 아프리카 보츠와나 건설현장에서 교통사고 참변을 당했다. 한 해 뒤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는 참척慘慽의 불효로 선산에 들지 못하고, 단지 고향과 이름이 같아서 선택한 경기도 장흥묘원에 묻혔다.

 

다음날 월요일 출판사 회의를 마치고 일찍이 아내와 함께 수목원을 찾았다. 조부모, 부모님 나무를 미리 정해 두기 위해서였다. 항상 마음속으로 준비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이렇게 조급하게 서둘러야 하는 속내는 뒤숭숭했다. 한 10년 가까이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우고 있는 25년생 3,300그루 반송 어느 한 그루인들 내게는 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년 봄부터 이삼십 년 자라더라도 방해받지 않게 수간거리를 넓게 조정하고 잔디까지 입혔으며, 그 둘레는 길을 따라 주목나무로 수목담을 조성한 인수전 건너편 ‘시범단지’ 2천 평을 다시 둘러봤다. 

 

마침 이곳 7백 평 1백 그루의 반송밭은 작년 9월 내가 창설한 ‘한양 조씨 산서공파 포천종중’ 수목장림으로 시청에 신고를 마친 곳이기도 했다. 우선 중앙의 널찍한 바위 곁의 앞뒤 두 그루를 선택했다. 동생들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나무가 크고 수형도 좋다고 했다. 한 번 정하면 영면하는 자리인데 정말 잘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어머니의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조급함에 너무 허둥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함은 계속 떨칠 수 없었다.

 

네댓 달 전부터 우연히 마주친 잘 생긴 큰 반송이 마음에 들어 수목원에 옮겨 심고 싶어 여러 생각을 하던 일이 스쳤다. 혹시 어머니가 이 나무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아내도 부모님에게 드리자고 했다.

 

지난 늦가을 포천 내촌면 마명리 동네사람들 부부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수선해 전부가 모이지 못했다며 베어스타운 뒤꼍의 초롱농원에서 오랜만에 오리백숙 모임을 가졌다. 마침 70 넘어 늦게 얻은 손자(조윤원)의 탄생축하 자리가 되기도 해 기분 좋게 한턱을 크게 냈다. 손자가 잘될 것이라는 덕담에 안 넘어갈 할아버지는 없다. 40년 가까이 나무를 가꾸는 성실함이 나무 같아 보이는 초롱농원 사장에게 반송가꾸기의 팁을 얻은 것은 덤이었다.

 

초롱농원에 있는 40년 가까이 정성을 다해 손질된 웅장하고 귀티나는 반송 몇 그루가 자꾸 눈에 밟혔다. 3천 그루가 넘는 내 반송도 한 15년 더 키우면 저런 나무가 될 것이라고 여유를 부리다가도, 내 반송의 15년 후 모습이라는 실제의 상징목으로 삼아 지금 수목원 반송밭에 옮겨 심고 싶은 조바심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나무 구경을 빙자해 서너 달 동안 몇 차례 농원을 찾아 안면을 텄다. 농원 사장은 수목원에 찾아와서는 자기의 로망이 이것이었다며 마음껏 동지애를 드러냈다. 가끔씩 수목원을 찾아 전지작업을 해주기로 하고 3월 30일 거금을 들여 그 반송 두 그루를 구입했다. 한 그루는 부모님께 드리고, 한 그루는 인수전仁壽殿 앞에 심어 3천 그루 넘는 반송들의 10여 년 후의 모습을 상상할 상징목이 되기를 기원했다.

 

지나간 세월은 어떤 의미 있는 것으로 기억할 뿐 지금으로 되돌릴 수 없어 안타까워한다. 지난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고 노래하며 자위하는 데 그친다. 흘러간 세월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아버지는 생전에 가끔 할 수만 있으면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대학 졸업장을 사고 싶다고 못 배운 한이 맺힌 푸념을 하셨다.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 그런 귀한 대학시절의 청춘을 허투루 보내지 말라는 훈계이기도 했지만, 꼭 대학 졸업장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당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悔恨이었을 것이다.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몸으로 체감한 것은 지난 시간을 되돌려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잘 자란 나무가 지난 세월의 틈을 간접적으로 대신 메워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어느 나무라도 살아온 세월을 증언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직접 심지 않은 나무면 어떤가 싶어서다. 내가 직접 겪은 시간만이 내 삶이 되는 것이 아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나 문학작품을 통해 남의 삶도 공감하는 간접경험도 내 삶의 일부가 된다. 어쩌면 시장에서 매겨지는 나뭇값은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늠름하게 대신 지켜준 그 세월을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보상받는 훌륭한 수단일 수도 있지 싶다. 이제 내 나무가 되면 그 나무가 생장한 그 시간들까지 내 것이 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4월 27일 문재인·김정은의 판문점 선언 후 전쟁의 공포를 떨쳐내는 평화의 상징으로 65년 된 반송을 판문점에 기념 식수했다. 1953년 휴전 이후 65년이 되었다는 그 시간들을 이 나무에 화체시킨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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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코마상태로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어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다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누구나 걷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그렇다고 했다. 3월 두세 주 동안 갑자기 울릴지 모르는 핸드폰의 부음소식으로 초조하게 준비를 서두르다가 마침내 3월 30일(화요일) 초롱농원의 반송을 수목원으로 옮겼다. 워낙 큰 나무이기도 했지만 나무를 잘 살리려고 분을 크게 뜨는 바람에 크레인이 동원되는 큰 공사가 되었다.

 

수목원을 오르면 산중턱에 갑자기 맞닥뜨리는 개마고원처럼 펼쳐지는 반송밭 앞에 자리를 마련했다. 큰마음 먹고 그 중간에 끼어 답답해 보이던 힘들게 키운 큰 키의 가문비나무 두 그루와 주목나무도 파내 옮기고 보니 새로 생긴 확 뚫린 공간이 시원해졌다. 수십 번 머릿속에 그렸던 공간의 재배치를 위해 1백여 평 잔디를 새로 깔고 주변 환경을 정리하느라고 봄날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조부모님을 모실 나무로는 호숫가 40년 장송을 선택했다. 초봄에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지를 잘 다듬었는데 이렇게 할아버지 할머니의 나무가 될 줄은 그때는 생각도 못했다. 아들, 며느리를 가까이서 내려다보며 못 다한 얘기를 나누시며 외롭지 않게 영면하셨으면 좋겠다.

 

옛돌박물관 천신일 회장께서 수목원의 안녕을 기원하며 기증한 잘 생긴 키 큰 보물급 문인석 두 분도 부모님을 잘 지켜주시라는 염원으로 수목원 입구에서 반송 앞쪽으로 옮겼다. 책 박물관 뜰에 있던 조선 중기의 석등도 장명등長明燈의 본분대로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을 밝게 비추시라고 이곳으로 옮겼다.

 

이제 수목원을 부모님께 바치는 의식을 위한 준비는 마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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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음력 5월 10일) 어머니는 운명하셨다. 8~9년 동안 요양병원 생활을 하시다 중환자실에 실려가 마지막 실눈을 떴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지 97일 만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때여서 고애자孤哀子가 되었다고 부고訃告를 내기도 쑥스러웠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좋을 이웃 몇 명에게만 소식을 알렸다. 그중에 어떻게 알고 찾아온 조문객들은 정말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할머니에 이어 평생 절을 찾았던 어머니는 5~6년 전 동생 혜영이의 권유로 천주님에게 의탁하셔 ‘마리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2년 전 명동성당에서 아들을 장가보내는 혼례미사에도 혼주婚主로서 성당 맨 앞줄에 앉아 감회가 새로웠는데, 이번에는 상주喪主로서 맨 앞줄에 앉아 치른 광주 방림동 성당의 장례미사는 장엄했다. 60년 전 중학교를 다녔던 양림동 외가댁 바로 근처 성당이었다. 5·18 국립묘역 옆의 화장장은 규모와 설비가 호사스러웠다. 광주에서 포천 수목원까지 북쪽으로 달리는 영구차의 천릿길은 멀고도 멀었다.

 

미리 마련한 40년생 반송 밑에 부모님을 합장으로 모셨다. 모두가 공유하는 거대한 공원의 큰 나무로 돋보였지만 너무 허전하여 조그마한 오석烏石으로 표지석을 마련했다. 조선조 선비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탈상할 때까지 3년간 시묘를 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평생을 항상 곁에 가까이 모시게 된 셈이다.

 

며칠 전 미국 주립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를 하는 아들이 방학을 맞아 손자를 데리고 잠시 귀국하여 성묘를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찾아가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영상통화로만 보던 70 넘어 얻은 손자여선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3대.jpg

성묘하는 3대. 기어다니는 손자가 마치 절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아버지, 나, 아들 3대가 함께 있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35년 전의 흑백사진이 오늘 여기서 다시 재현된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 이제는 한 세대씩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나와 아들 손자 그리고 며늘아기가 아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에 담겼다.

 

돌도 되지 않은 기어 다니는 손자가 마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절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42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해에 아들이 지금의 손자처럼 첫돌 주변이었던 것도 생각이 스친다.

 

손자를 안고 시간의 매듭들이나 핏줄의 장구한 운명을 생각해 보는 것은 나 혼자만의 감회였을까. 바람결에 날리는 깃털 같은 어떤 것이 삶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번뜩 스치는 찰나의 영속성에 몸을 움찔했다. 유난히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한여름이었다.

 

2021. 7.19.

 

<언론의병장의 꿈>, 60~70p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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