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벌의 습격 ― 그 여름의 사흘
작성일 : 22.08.09   조회수 : 378

지난해부터 수ㆍ금ㆍ토요일은 정례적으로 수목원 일을 하는 날이다. 월ㆍ화ㆍ목요일은 출판사 일을 해야 한다. 수익이 없이 계속 투자만 하는 수목원의 묘목값을 벌기 위한다고 둘러대기도 하지만, 40년 넘는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앞으로는 저희들이 다 해야 하겠지만 젊은이들의 원고 처리속도가 답답하기도 하고, 고황膏肓처럼 출판 일에 중독된 노파심이 책 원고를 보게 한다. 70을 넘으면서 몸에 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으로 새벽에 생긴 맑은 시간을 선용하는 뜻도 있었다.

 

제헌절을 앞둔 지난 금요일은 아침 일찍 수목원에 가지 못했다. 파주 출판사에서 수목원까지는 경기 북부의 한가한 길이어서 KTX처럼 정확하게 1시간이 걸린다. 나의 넬라판타지아를 찾아 10년 넘게 달리는 상쾌한 길이다. 한 3년 후에 제2순환도로가 개통되면 시간이 절반으로 줄 것이다. 오후 2시에 창덕궁 앞 세중 천신일 회장 빌딩에서 원고를 협의해야 했다. 한두 해 전부터 준비했다는 사진으로 보는 당신의 8순 기념 책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오랜만에 만난 천 선배의 건강이 눈에 띄게 안 좋아 보인다. 마치 9순을 앞둔 노인 같은 형색에 마음이 안타까워 짐짓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친구 대통령 만들기의 성취감보다 더 큰 허업虛業이라는 정치의 칼날에 스친 상처로 건강을 해친 것 같다. 9월 1일 고려대 명예경영학박사 학위수여식 연설원고를 써 달라는 부탁도 축하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필숙 디자인 실장과 신윤섭 편집이사는 원고를 책임진 김기백 세중 사장과 더 협의하라고 남겨두고 아내와 함께 수목원을 향했다. 평일 오후인데도 서울 시내 교통은 더욱 복잡했다. 종로 4가에서 수목원까지 2시간이나 걸려 5시 주변에 도착했다.

 

지난주부터 인수전 앞 2천 평 반송시범단지 잔디밭을 깎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려고 잔디깎이 자동차를 움직였다. 해질 무렵 2시간 동안은 우선 뜨겁지 않아서 좋았다. 직원들이 퇴근한 적막강산寂寞江山에서 혼자서 부지런을 떨며 잔디 깎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어둠이 슬금슬금 내릴 때까지 절반을 마치는 일한 보람은 장마철에 웃자란 잡초들을 모두 깎아내자 반기는 녹색 융단이 펼쳐진 잔디밭의 고즈넉한 평화에 있었다. 2년 만에 착근한 근사한 잔디밭 위에 우뚝 선 반송들이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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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전날인 다음 날 토요일에는 여명의 눈동자에 어둠이 쫓겨 가자 미처 못 다한 잔디 깎기를 서두르며 새벽길을 나섰다. 하지가 지난 지 한 달 가까이 되자 5시 넘어서야 날이 밝는다. 우선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신 큰 반송 아래 잔디밭부터 깎기 시작했다. 다음 날이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이기도 했다.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수목원에 수목장으로 모시면서 인수전 앞 호숫가 오른편에 마련한 우리 형제들의 고즈넉한 성지였다. 어쩌면 내가 창설한 한양조씨 산서공파 포천 종중의 원형이기도 하다. 

 

작년 6월 부모님께 수목원을 바치는 수목장 현장에 함께한 여러분들이 조의를 표하면서도 이렇게 좋은 자리에 모셔진 부모님에 대한 부러움도 같이하며, 나의 효행을 말하기도 했다. 그중 두 분의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다. 

 

한양대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90이 된 이강수 교수가 10년 동안 수목원을 못 와봤다며 어머니 수목장에 자리를 같이해 행사를 유심히 지켜본 모양이다. 금년 1월 사모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나를 찾았다. 당신의 뜻도 확고했지만 30년 넘게 보아온 이수영 서강대 교수를 비롯해 온 가족이 박사인 선비집안 자제들의 효심도 존중해 ‘수목장 1호’로 모시게 되었다. 이강수 교수는 여러 해 동안 고향 남원에 조성했던 선산까지 수목원으로 옮기겠다며 주변의 반송 서너 그루를 미리 찜해 놓기도 했다. 

 

금년 6․25날에는 지난 3월 1일에 106세로 돌아가신 김병기 화백의 수목장이 수목원에서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2년 동안 중단되었던 제20회 ‘지훈상’ 시상식을 5월 14일(토요일) 수목원 책박물관 앞 잔디밭에서 열었다. 30년 넘게 친교하는 김형국 박사가 축사를 했다. 내가 조지훈 시인의 혈통이 아닌 법통을 잇는다는 격려가 고마웠다. 대작 〈박경리 이야기〉 출간으로 출판사를 자주 출입하던 김 박사가 작년 어머니 수목장이 인상 깊었다며 문화예술인을 모시는 주춧돌로 김병기 화백의 수목장을 협의했다. 저간의 경과는 다음 신문기사가 잘 말해 준다.

 

“김병기 화백 나남수목원 반송숲에 잠들다”

‘106살 최고령 현역 화가’로 활동하다 지난 3월 1일 별세한 고 김병기 화백이 6월 25일 경기도 포천 나남수목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유족들은 이날 나남수목원의 반송숲에서 ‘고 태경 김병기 화백 수목장’을 진행했다.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고인을 기리고자 셋째딸인 김주향ㆍ송기중 씨 부부 주관으로 간단한 추모 예배를 올렸다. 또 막내아들 김청윤 조각가는 아버지에게 영면의 자리를 마련해 준 수목원에 감사하다며 작품 〈기도〉를 수목원에 기증했다. 6미터가 넘는 강판을 용접한 대작으로 아버지의 눈길이 머무는 인수전 옆 널찍한 잔디밭에 우뚝 섰다. 김 작가는 “여행 중이던 어느 날 새벽 숙소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사람의 형상이 떠올라 아내(오정희 화가)와 함께 스케치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날 표지석에는 고인이 별세 5일 전 한글과 한자로 직접 쓴 ‘김병기, 감사합니다’ 서명을 새겼다. 이번 수목장과 표지석 건립은 고인의 말년 평창동 시절 자별하게 지냈던 김형국 가나아트재단 이사장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김환기ㆍ김향안 부부가 잠들어 있는 미국 뉴욕주 발할라 산마루의 켄시코Kensico 묘지에 20여 년 전 먼저 떠난 부인을 묻으면서 자신의 자리도 마련해 뒀다고 고인 생전에 들었어요. 그런데 유족들이 100세전을 계기로 국적을 회복하고 영구귀국한 부친의 뜻에 따라 한국에 모시기로 결정했어요. 마침 최근에 조상호 나남수목원 회장이 20년 가까이 키워온 3천여 그루의 반송 숲에 양친을 이장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곳에 수목장을 추천했어요.”

(한겨레, 2022.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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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만 100세의 현역 화가’ 김병기金秉騏 화백의 회고전 ‘백세청풍’百世淸風이 서울에서 열렸다. 전시의 부제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서 따온 ‘바람이 일어나다’였다. 100년 동안의 바람, 그것은 항상 일어나 만 100세에 신작으로 개인전을 여는 화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 자신이 현대 한국미술사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윤범모, 〈백년을 그리다〉, 2018, 한겨레출판)

 

평양의 갑부인 화백의 부친 김찬영은 1910년대의 도쿄미술대학 졸업생으로 근대 서양화의 선구자였다. 60년 전 세상을 떠난 이중섭이 김병기 화백과 초등학교 짝꿍이고, 1930년대 도쿄의 문화학원 미술학교 동창생이다. 피난지에서 굶주림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붓을 들었던 이중섭은 요절하고 100년의 신화를 얻었다. 김 화백은 조국의 분단과 전쟁의 질곡 속에서 서울 미대 교수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의 지위를 버리고 화업을 위해 1965년 49세에 미국 뉴욕에 정착한다, 김환기, 김창열, 백남준과 자주 어울렸다. 그리고 1986년 감격스러운 귀국 개인전을 열었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감각의 분할) 이후 49년 만에 귀국했다. 2017년에는 101세로 반세기 전인 1954년 창립을 주도했던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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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바람이 일어나다〉

 

김병기 화백의 아들 김청윤 작가가 기증한 우람한 조각 〈기도〉가 풍기는 서구적 강판의 근육질이 고즈넉한 전통 한옥 ‘인수전’과 묘하게 어울렸다. 아침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한 시간 넘게 5백 평 가까운 이곳 잔디를 깎았다. 초록 잔디밭에 우뚝 선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조각상은 하늘을 향해 솟구친 뻘건 용암이 식어서 굳어 있는 것 같은 윤기 있는 검은 색이 더욱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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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윤, 조각상 〈기도〉

 

인수전 앞 잔디밭을 정리하며 상쾌한 기분으로 잔디자동차를 몰았다. 아침녘이라 보릿대 모자도 쓰지 않은 머리 주변에 무언가 날것 두세 마리가 날아들었다. 손을 내저어 쫓았더니 따끔하게 팔을 쏘았다. 몇 년 동안 여러 번 벌에 쏘여본 경험으로는 통증이 가볍지 않았다. 곧이어 머리 정수리에 서너 방 벌침이 박혔는지 따끔따끔거렸다. 그동안 벌에 쏘일 때마다 아무나 경험하지 못하는 천연 봉침을 맞았다고 자위했지만 이번에는 말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주위를 살펴보니 인수전 처마에 말벌들이 분잡하게 윙윙거리는 처음 보는 커다란 하얀 말벌집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하지도 못한 갑작스런 잔디자동차의 굉음에 놀란 말벌들이 습격한 모양이다. 2,30분 더 잔디를 깎는데 얼굴이 화끈거리고 얼굴이 부어오르며 마침내 입술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기간 치과치료를 받아본 경험이지만 마취주사를 맞고 난 다음의 그 기분이었다. 이러다 입술이 굳으면 말도 힘들어질 것 같은 위기감이 스쳐 핸드폰으로 아내와 수목원 조용승 국장을 불렀다. 

 

내 힘으로 올라탄 자동차에 실려 간 20분 거리의 포천의료원은 응급실이 공사 중이었고, 그 옆 강병원은 일과시간 전이라고 해서 송우리 우리병원까지 또 30분을 실려 갔던 모양이다. 정신을 잃었는지, 깜박 졸았는지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떴다. 

 

병원 응급실은 자주 가보았지만, 항상 보호자의 입장이었지 내가 당사자인 환자가 되어 보긴 생전 처음이었다. 이젠 아내가 보호자의 자리에 섰다. 시트 뒤의 깜빡이는 맥박 그래프가 출렁이는 작은 컴퓨터 모니터가 낯설었고, 해독제를 넣은 링거병의 고무줄에 의존해 수액을 맞는 말벌에 쏘인 70 넘은 노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그렇게 또 잠들었던 모양이다. 응급실에서 내쫓긴 보호자인 아내는 응급실 문이 열릴 때마다 문틈으로 잠든 나를 살피며 애를 태웠다고 했다. 한 달 전 코로나를 내가 앓을 때 간호했던 마음씀이 되살아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플 시간도 없이 일했던 평생 건강체였던 남편이라 더욱 그러했으리라.

 

깨어나 병원 문을 나섰다. 수차례 건강검진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하면서 수면마취에서 깨어났을 때와 비슷하게 어리둥절했다. 잠시 동안 필름이 끊겼다가 다시 정신이 든 것 같은, 당혹스럽지만 개운한 기분이었다. 컴퓨터 작업을 할 때 가끔씩 버벅거리면 전원을 껐다가 재부팅하면 쉽게 정상을 되찾기도 한다.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우연한 말벌들의 독이 내 몸 어딘가를 깨끗이 정화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목원으로 돌아오면서 ‘기적 같은 별일 없는 하루의 행복’을 떠올렸다. ‘가끔은 고독할 필요가 있다’는 지리산 구영회 작가의 잠언이다. 새벽의 말벌소동이 없었다면 항상 그러하듯 이 시간이면 ‘조찬모임’이라고 조 국장과 골프장 앞 식당에서 해장국을 먹고, 하루 일과를 확인하고, 나는 10년 넘게 일상이 되어 버린 ‘보람찬 하루 일과’ 그대로 반송밭 어느 나무를 전지하며 바람길 햇볕길을 열어 주고 있었을 것이다. 

 

톱과 전지가위를 들고 다시 나무 앞에 섰다. 아내는 쉬라고 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는 일 이외에는 달리 할 일도 딱히 없었다. 해독제의 덕택으로 부었던 얼굴도 가라앉고 눈썹 사이에 아직 뭉쳐 있는 부기浮氣로 장비 같은 인상만 스쳤다. 7, 8년 전부터 별일 없으면 토요일마다 나와 함께 반송 전지작업을 하여 이제는 ‘나무의 얼굴’까지 아는 홍성천 건축설계소장도 내 얼굴만 보고는 아침의 말벌소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다음 날 일요일에 등산객 30여 명이 등산길에서 말벌들의 습격을 받아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토막뉴스가 떴다. 산중 등산길에서 병원은 가까웠는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구했는지 이젠 남의 일 같지 않은 걱정을 했다. 요즘 세태처럼 유별난 폭염에 말벌들의 성화도 유별나게 치닫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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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주 화요일은 열흘 전인가 〈고대신문〉의 인터뷰를 약속한 날이다. 졸업한 지 50년이 다 되는 졸업생인데 무슨 뉴스밸류가 있느냐고 손사래를 쳤다. 두 면 심층취재라며 부득부득 우기는 어린 여학생 기자를 내칠 심사로 내 책 3권 ― <언론의병장의 꿈>, <나무심는 마음>, <숲에 산다> ― 을 보내주며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화요일 9시 전에 사진기자와 함께 출판사에 나타난 여학생 기자는 당찼다. 아들의 20년이 다 되는 후배들인데 잘생기고 총명함이 넘치는 이른바 신인류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 책을 다 읽고 왔다니 기사내용은 대충 미리 정리한 것 같아서 출판사 일과 수목원의 일상을 보여주기로 했다. 영문학과 2학년이라는데 대부분 대학생이 비대면 코로나 사태로 허둥지둥 헤맬 때, 이이는 대학신문 기자일로 보람찬 대학생활을 개척하는 것 같아 더욱 예뻐 보였다.

 

두 학생을 내 차에 태우고 한 시간 동안 수목원으로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노인이 직접 운전하는 불안이 가셨는지, 그 사이에도 메모하랴 녹음하랴 부지런을 떠는 모습도 제법 기자 티가 났다.

 

출판사에서는 인쇄매체에 익숙해선지 40년간의 업적에 크게 놀라지 않더니만 20만 평의 수목원에는 처음 경험인지 경탄을 하는 듯했다. 중턱의 인수전 앞의 잘 가꾼 3천 그루 넘는 반송밭에서 더욱 그러했다. 경쟁하듯 하얀색 붉은색으로 무리지어 곱게 피어올라온 수련을 설명해 주려고 호숫가의 벤치로 다가갔다. 수련은 수련水蓮이 아니고 수련睡蓮으로, 매일 오전에 꽃봉우리가 피었다가 오후에는 꽃봉우리가 오므라들어 다시 잠을 잔다는 이야기와 연꽃과 달리 잎을 물 위에 띄우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때 벌떼가 습격했다. 새봄 새빨간 꽃으로 그 자태가 아름다운 40년 넘는 철쭉나무 밑 풀밭에 둥지를 튼 땅벌들인 모양이다. 엊그제 말벌에게 쏘인 본능으로 두 학생을 감싸고 재빨리 피하기는 했지만 두세 방의 천연 봉침을 이마와 팔에 또 맞게 되었다. 서울내기의 연약한 어린 여학생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벌에 쏘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런 일은 수목원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의연한 척했지만, 이들을 출판사에 다시 데려다 줄 걱정이 태산 같았다. 통증이야 견디면 되었지만, 말벌에 쏘였을 때와 같이 잇따른 졸음이 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0년 넘게 천 번 이상을 달렸을 이 길이 왜 이리 멀기만 한지 몰랐다. 졸지 않으려고 시시한 이야기들도 계속해야 했다. 여학생 기자가 아버지는 방송국에 근무하며, 어머니는 신문방송학 박사를 마쳤다고 털어놓으면서 언론학 전문출판사인 나남이 자기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곳이 아니라며 애정을 보이며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한여름 말벌 습격으로 시작된 사흘간의 대장정이 이렇게 끝났다. 

 

 

2022. 7. 19.

 

 


 

 

책과 나무가 어울리는 세상을 꿈꾸다

(고대신문, 2022. 7.31)

 

 글: 심수연 기자

사진: 양수현 기자

 

조상호(법학과 70학번) 나남출판사 회장 인터뷰

 

사명감 가지고 출판 경영

자유로운 사상의 저수지 이룩

"흔들리지 않는 젊음 되길"

 

문화와 사상의 저수지로서 이상적인 출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있다. 조상호(법학과 70학번) 나남출판사·나남수목원 회장이다. 책을 내는 일과 나무를 기르는 일. 그는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 사이에서 생명의 존엄과 가치라는 공통점을 찾아냈다. 타오르는 끝 여름, 파주의 나남출판사를 찾아 조상호 회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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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회장은 “내가 아는 것, 읽을 수 있는 것만을 출간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신념 있는 출판사의 성장

 

1970년 본교에 입학한 조상호 회장은 대학 생활을 평범하게 이어가지 못했다. “학생운동과 지하 신문 <한맥> 활동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많이 방황했습니다.” 그는 사회에 대한 실망 속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을 갈고닦는 일을 계속했다. 여러 활동을 하며 고등학생 때부터 가졌던 언론인을 꿈꾸기도 했지만, 당시 정권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언론인에 대한 열망에 그는 꿈과 생존의 타협점으로 ‘책장수’를 선택했다.

 

시작은 사회과학 서적이었다. 협소한 시장이었지만, ‘쉽게 팔리지 않고 오래 팔립니다’라는 신념으로 뜻이 있는 분야에 발을 들였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졌던 언론 분야에서 더욱 전문성을 드러냈다. “나남출판사를 빼고는 신문방송학 커리큘럼을 논할 수 없죠. 교수들의 연구서와 전공 도서 등을 출간하고, 나남출판사의 책으로 공부한 이들이 다시 교수나 기자가 되며 굳어졌어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론학에 대한 수요와 관심이 커졌고 출판사는 학문과 함께 몸집이 커졌다. 신념을 지키면서도 성장하는 출판사로 거듭났다. 나남출판사의 성장에는 문학도 한몫했다. “뜻밖의 인연으로 출판한 박경리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이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출판사의 신념을 현실화하는 물적 토대가 됐죠.”

 

‘책장수’에서 인정받는 ‘출판인’의 입지를 갖게 되자 정계에서 여러 제안이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완곡히 거절했다. “나 말고도 정치할 사람은 많습니다. 품격 있는 출판사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힘들게 걸어온 올곧은 길을 지금 와서 저버릴 수는 없었다. 많은 판매 부수를 약속하며 정치인 홍보용 도서를 출간해달라는 달콤한 유혹에도 그는 같은 자세로 일관했다. “내가 아는 것, 읽을 수 있는 것만을 출간합니다. 내 가게의 것을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면 답답하죠. 스스로 떳떳한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조 회장은 그렇게 만들어진 나남출판사의 특색과 결을 ‘저수지’로 표현했다. 다양한 물줄기를 한데 모아 아우르면서도 가장 아래에서 지조를 지키겠다는 뜻이다. 출판인으로서 좌우 모두를 아우르는 ‘사상의 저수지’ 이룩이 조상호 회장의 목표다.

 

 

수목원에 심은 뜨거운 헌신

 

꼿꼿한 정신과 노련한 경영에 사람들은 조상호 회장을 고고한 존재로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경험한 현실은 달랐다. “문화와 경영처럼 상반된 것을 양립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것만 기대하죠. 그 너머에는 현실적인 고충이 많습니다.” 책을 다품종 소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관리자가 필요하다. 종류가 다양하고 그 수가 적을수록 개별적인 책들의 위치 파악이 어렵기 때문이다. 감수 과정 또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출판사와 달리 회장이 직접 가장 먼저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고고할 것 같은 출판사의 현실은 뜨거운 헌신에 있습니다.”

 

나남출판사라는 지성의 저수지를 다지며 그의 50대도 지나갔다. 세상의 논리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 세월이었다. 지금 그는 세상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다짐과 녹색 공간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고 있다. “마음속 숲을 실현할 수 있는 아지트를 갖고 싶었어요. 개발에 뺏기지 않을 땅을 찾다 지금의 수목원 땅을 찾았죠.” 나남수목원은 원하지 않는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그에게 좋은 변명이 돼줬다. “묘목밭에 물 주러 가야 합니다.” 외부의 꾐에 귀가 솔깃해질 즈음 수목원에 와서 마음을 다잡은 지도 14년이 지났다.

 

 

마음속 저수지가 현실로

 

나남출판사 사무실에서 차로 1시간을 달리면 포천의 나남수목원에 도착한다. 조상호 회장은 수목원에 들어서자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식물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그는 ‘직접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나남수목원의 특별함을 자랑했다. 애정 어린 조 회장의 설명은 반송밭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초록 우산처럼 동그랗게 반송을 예쁘게 깎아주고, 바람이 통하게 가지를 가꾸고, 풀을 베는 것이 내 할 일입니다.”

 

“위기도 있었어요. 수목원에 산사태가 나서 직접 복구 작업을 했습니다. 석축을 쌓아 길을 뚫고, 산봉우리를 무너뜨려 그 흙으로 협곡을 메웠죠.” 많은 재원이 투자된 거대한 공사는 임업 전공자라면 상상도 못 할 방식이었다. 조 회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가끔은 역사의 아마추어가 큰일을 이루기도 하는 법”이라며 “그저 이겨내야 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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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회장이 나남수목원에서 반송가지를 다듬고 있다.

 

수목원의 한쪽에는 특이하게도 책 박물관이 있다. 나남출판사에서 발행한 모든 도서가 전시된 곳으로 조 회장과 함께한 지식인들의 서재가 갖춰져 있었다. 조 회장이 보물로 여기는 물건들도 이곳에 있다. 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 실물모형, 황지우 작가의 조각상 등은 그의 삶의 궤적과 인연을 보여준다. “지나온 삶의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어요. 이 향로는 제 수호천사와도 같습니다.”

 

그는 나남수목원이 시민 주도의 기념 공원, 추도 공원이 되기를 꿈꾼다. 문화예술계의 거장들이 이곳에서 영면의 안식을 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현재는 그의 부모와 故 김병기 화가를 모시고 있다. “수목원의 나무들이 위인들의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삶의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조상호 회장은 젊은 청년들을 위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본인 세대는 외부적 충격에 삶이 달라지는 처지였지만 현재 젊은이들은 충격 없이도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젊은이에게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결심할 수 있는 젊음’을 바랐다.

 

“나는 지성의 저수지 수호자, 나남이라는 자유의 간이역장이 되고 싶습니다. 대단한 걸 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관여하는 범위 내의 정의를 실현하면서 범위를 점점 늘려갈 뿐입니다. 여러분도 범위의 확대를 통해 하루하루 성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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