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왕참나무’의 정명법(正名法)은 ‘손기정참나무’ 혹은 ‘손참나무’이다
작성일 : 17.10.23   조회수 : 1501

‘대왕참나무’의 정명법(正名法)은 ‘손기정참나무’ 혹은 ‘손참나무’이다



숲에는 향기가 있다. 숲향기가 그것이다. 수목원을 찾는 사람마다 항상 처음으로 하는 말은 ‘역시 공기가 다르네요!’ 하는 탄성이다. 숲향기와 함께 산새소리와 계곡 물소리에 욕망에 찌든 저잣거리의 먼지를 털어내는 경계를 넘는다는 신호이다. 숲향기는 꼭 집어 무슨 향기라고 말할 수 없는 숲에 배어 어우러진 공기로 느끼는 합창이다. 벌써 눈은 들국화라고 불리는 베이지색보다는 하얀 키 큰 구절초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벌개미취 꽃 자리를 대신 채우는 초가을에 압도되고 있다. 스스로 향기를 발산하는 나무로 계수나무와 대왕참나무를 꼽는다. 수목원에도 여러 곳에 계수나무를 심고 항상 물이 마르지 않는 작지 않은 계곡길을 따라 대왕참나무 50여 그루를 키우며 숲향기를 꿈꾼다. 

 

성장과정에서 내게 의미가 있었던 나무들을 찾아 직접 키우고 싶은 수목원을 욕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나무 밑에 묻힐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나무를 통한 나의 스토리텔링의 궤적이 작은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분의 합이 훨씬 큰 전체가 되어 의도하지 않았던 위대한 숲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왕참나무의 수해(樹海)를 가슴 뜨겁게 안은 것은 10년 전 미국 보스턴의 MIT대학을 구경하고 나오던 언덕 위에서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바다같은 이 나무의 가로수길 숲을 마주쳤을 때였다. 아들이 유학하던 코넬대학에 있는 뉴욕대 농대의 수목원을 찾아가던 길에 들른 것이다. 갑자기 새빨갛게 단풍이 드는 복자기 단풍보다 초록이 느릿느릿 물들어 가는 대왕참나무의 단풍에서 가을이 가는 시간을 지켜본다. 느슨한 별모양의 잎도 유별나지만 낙엽이 지기 전 떨어진 까만 껍질에 소중하게 싸인 큰 흑진주 같은 도토리는 그렇게 앙증스럽다.

 

내가 대왕참나무와 사랑에 빠져들기 전에 이 나무는 서울에 들어온 지 벌써 80년이 지난 것을 알았다. 나무사랑의 눈썰미가 무림의 고수인 〈한국일보〉 이계성 논설실장의 귀띔 때문이었다. 그는 지난 5월 책박물관 개관식 때 세련된 산악인의 차림으로 수목원을 스스럼없이 찾았다. 나는 수목원 현장의 경험으로 그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여러 나무들에 얽힌 이야기로 서로가 귀한 시간을 공유했다. 숲은 사람들의 체면이나 허세를 무장해제시키는 묘한 힘이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는 2년 전에 쓴 대왕참나무에 대한 그의 칼럼도 챙겨서 보내주기도 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의 한여름은 더욱 무더웠을 것이다. 히틀러 총통의 2차 세계대전의 야욕이 올림픽의 깃발 속에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세상이 지켜보는 영광의 절정인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대에 우뚝 선 조선의 건각 손기정(孫基禎) 청년은 독일 사진가의 표현처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의 사진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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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넘게 이를 악물며 달려 자신을 이겨낸 장거리 주자(走者)의 고독도 조국이 없는 안타까움에 비할 바가 없다. 결승점에서 100미터 뒤져 동메달을 받은 남승룡 선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고개를 떨군 승자들. 가슴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일장기 때문이다. 식민지 청년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극의 절정이다. 내심 아리안족 백인의 우승을 기대했던 히틀러 총통은 일독(日獨) 동맹을 떠올렸는지 일장기를 단 손기정에게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며 축하의 월계관을 씌워준다. 그리고 싱싱한 묘목화분을 부상으로 가슴에 안긴다. 이 화분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자 손기정의 얼굴에 인간승리의 기쁨이 배어났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감동이 뒤늦게 번졌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손기정의 감격적인 우승을 보도하는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1936년 8월 13일자)의 목숨을 건 일장기 사진 말소사건은 며칠 뒤의 일이다.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던  〈동아일보〉 이길용(李吉用) 기자가 사진부 신낙균(申樂均) 등과 의논하여 동판사진 중 일장기 부분을 청산가리 농액으로 말소하여 보도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9개월간의 장기정간을 당했다. 사진 게재가 문제된 것은 처음이기도 하지만 세계언론사상 그 예가 드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송진우(宋鎭禹) 사장·김준연(金俊淵) 주필·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등이 자리를 물러나고 8명의 기자가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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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 아사히〉 신문(8월 23일자, 왼쪽)과 〈동아일보〉(8월 25일자) 보도사진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조선청년이 이룬 민족적 쾌거의 감동은 〈조선중앙일보〉 호외 뒷면에 실린 〈상록수〉를 쓴 소설가 심훈(沈熏)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된 즉흥시에 잘 나타난다. 


오오, 조선의 남아(男兒)여!

베를린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남승룡 양군에게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號外)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戰勝)의 방울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 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 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손기정은 이 화분의 나무를 서울역 뒤 중림동 만리재 언덕에 있는 모교인 양정고에 심었다. 오늘의 영광은 이 교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상징은 식민지 시절을 넘어 푸르게 기상을 떨쳤다. 이제는 손기정기념관이 된 그 자리에서 ‘월계관 나무’로 불리며 80년 넘는 거목으로 자랐다. 역사의 행간을 읽는 의미로 ‘서울시 기념물 제 5호’의 영광도 안았다. 



이 나무가 ‘대왕참나무’라고 불리는 ‘핀오크’(Pin Oak)이다. 손기정의 월계관도 물론 이 나무의 잎과 가지로 만든 것이다. 우리의 무궁화처럼 독일 동전에도 그려진 독일사람들이 사랑하는 참나무이다. 1980년 이후 이 나무가 백합나무처럼 미국에서 수입되어 이제는 가로수 길에서도 눈에 띄게 일반화되고 있다. 그러나 ‘핀오크’의 번역으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대왕참나무라는 이름은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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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월계관 나무가 이만큼 자랐다. 생전에 양정교정을 찾아 기념나무를 껴안은 손기정 옹.

 

‘참나무’라는 별도의 나무는 없다. 열매인 도토리가 가장 큰 상수리나무, 도토리가 가장 작은 졸참나무, 잎을 떡 찔 때 쓴다는 떡갈나무, 짚신에 덧깐다는 신갈나무, 나무에 골이 깊이 패인 갈참나무 5형제 ‘참나무류’를 ‘참나무’라고 부른다. 가을꽃을 이르는 ‘들국화’도 야생에서 자라는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 황국, 감국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이제 이 나무를 ‘손기정참나무’ 혹은 ‘손참나무’라고 이름을 부르자. 이 이름이어야 우리 젊은이들이 그 역사성의 치열함을 다시 깨치고 거목의 품에서 전설의 부활을 꿈꿀 수 있다. 정명법(正名法)은 형이상학의 거대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김춘수 시인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 다음에 열린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黃永祚) 선수는 악마의 구간인 몬주익 언덕을 넘으면서 고통을 이겨내려 ‘손기정’을 외쳤다 한다. 4년 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의 마지막 주자인 76세 역사의 거인 손기정의 피맺힌 염원이 주술처럼 그의 등을 든든하게 받쳐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냈다. 태극기를 가슴에 새기고 월계관을 쓴 그의 기관차 같은 심장은 또다른 ‘손기정’의 꽃이었다. 시상대 위에서 태극기 밑에 일장기(2위 모리시다)와 독일국기(3위 슈테판 프라이강)가 오르는 것을 보고 66년 전 손기정 선수의 감동과 고뇌가 떠올랐다는 그다. 손기정 옹은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다”고 화답했다. 현대 물질문명에 편한 것만 찾아 자꾸 왜소해지는 세태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우리 역사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손기정참나무’의 위대한 부활이 그것이다. 나무는 바로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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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일부는 2017년 10월 13일 〈한국일보〉의 '삶과 문화' 칼럼에 기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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