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심는 마음
작성일 : 15.11.12   조회수 : 724

나무 심는 마음

 

 

아들이 커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한 세대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나도 저 녀석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세대는 저처럼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잖느냐는 아들의 볼멘 표정도 읽힌다.

 

아들을 통한 젊은 날의 꿈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리보상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씩 성장하면서 자신의 공간을 넘어오지 말라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도편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륜을 바탕으로 한 훈수에도 뚱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효도의 마음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다고는 했지만, 슬하의 자식이 아니라 이젠 또 다른 자신의 세계로 비상하는 날갯짓을 이미 시작한 뒤였다. 핏줄로 튼튼하게 연결된 듯한 고리가 끊기는 것 같고 다시 혼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 허허로움을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적당한 긴장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어느 길에서 한 30년, 질풍노도의 세상 질곡을 헤쳐 살아남기는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나는 내가 걷는 길에서 흔들릴 때마다 앞선 이들의 흔적을 찾아 미륵불이나 큰바위 얼굴로 삼아 나름대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하는 채찍으로 삼기도 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사람을 미워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한 단계 한 단계 쌓아 올리다 보면 하늘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해야 했다.

 

길을 찾아 자신의 뜻을 세워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해도 그것이 남들에게 박수받는 일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지만, 폐를 끼치지 않고 이 공동체에서 나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이루어진 성취감이나 그 과정에서 희생된 욕망의 뿌리들에 대한 자신의 의미부여나 안타까움도 지나고 보면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일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사랑 나무들


나무 심는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계기는 아직도 모르는 일이다. 큰 뜻이 아니라 우연히 스치는 생각으로, 30년 전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기념으로 막 입주한 황량한 강남 개포동 7단지 아파트 입구에 거금을 들여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별난 사람 다 본다는 관리인의 지청구는 못 들은 체하기로 했다. 그 세월만큼 자식들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이젠 거목으로 자란 이 나무의 푸르름의 의미를 가끔씩 지나치면서 바라보며 스스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출판사를 시작하고 5년쯤 되어 서초동 교대 앞의 꽤 넓은 단독주택을 구해 이사했다. 잠시 동안은 책창고 걱정도 덜 수 있을 것 같고, 사무실 이사로 번잡을 떠는 것도 귀찮아 내가 사는 집의 1층과 3층을 출판사로 내줬다.

 

넓지 않은 뜰에 나무들을 많이 심었던 것 같다. 30년이 지났으니 기억이 아물거리지만, 이 중에서 내가 사랑했던 앵두나무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가 지금은 수목원의 책박물관 앞 호숫가에 정착하여 매년 탐스러운 빠알간 앵두를 뽐내고 있다. 옛날부터 그 자리를 지키던 주인 같은 늠름함이 배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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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나를 따랐던 앵두나무. 지금은 수목원 호숫가에 정착했다. 

옛날부터 그 자리를 지키던 주인 같은 늠름함이 배어난다.

 

 

1990년대 중반 바둑친구이기도 했던 김동찬 사장이 사업을 뉴질랜드로 옮기면서 양재역 앞 5층 빌딩을 내게 떠맡겼다. 나중에 뒷집을 구입해 두 배로 증축하여 ‘지훈빌딩’으로 이름 짓고, 맨 위층 내 사무실 곁에 조그마한 정원을 만들었다. 어릴 적 고향집 뒷문 뒤의 바람에 흔들리며 부딪히는 대나무 숲의 소리가 그리워 대나무와 작은 반송을 심었다. 건물 앞에는 내 분수에 맞지 않게 거금을 들여 장송 3그루를 심었다. 큰 뜻이나 계획이 있을 나이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니 마음이 편했다. 나름대로 번잡한 도회지 속에 나의 작은 녹색 공간을 만든 셈이다.

 

소나무들은 포천 광릉집을 마련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인근 광릉 숲의 소나무들과 친구하면서 자라서인지 자연의 수형이 귀티가 난다. 25년의 내 사랑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대나무들은 경기북도의 찬바람을 견딜 수 없어서 파주에 출판사 사옥을 지을 때 맨 위층에 그들이 자랄 수 있는 반 유리 칸을 따로 설계하여 그곳에 모시고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유년의 나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한다.


멀기는 했지만 파주 교하에 4천 평의 부지를 마련한 뒤 은행대출에 의지하여 농협창고 같은 큰 책창고를 신축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의 일로, 모험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 하나를 얻는다고, 고금리와 원금상환이라는 그 전쟁에서 두 번 죽다 용케 살아난 셈이다.

 

은행대출로 확보한 자금에, 은행의 불량채권이었던 파주 적성면의 1만 5천 평 임야가 나에게 떠넘겨졌다. 몇 년 방치했던 땅에 나무를 심기로 했다. 해마다 어린 자식들의 고사리손까지 빌려 심었던 묘목들은 죽기를 반복했다. 정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나의 용감한 무지의 당연한 결과였다. 서초동 사옥에서 두 시간 거리의 그곳을 오가며 녹색생명에 대해 얼마나 애달파 하고, 절망하고, 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는지 셀 수 없다.

 

산림조합에 가입해 그들의 도움으로 10년 동안 자작나무 5백 그루를 키워냈다. 파주 사옥 뒤편의 작은 자작나무숲과 수목원의 자작나무 길에 찬란하게 도열하여 나를 반기는 나무들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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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수목원 자작나무 길


 

나무심기의 제1과, 제1장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농부의 마음으로 처음에는 포천 내촌면에 마련한 광릉집 뒷터 5백 평에 반송과 주목, 산수유 묘목을 심었다. 여름이 무르익기도 전에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배운 것 말고는 덩굴 제거와 잡초 뽑는 일에 벌써 지치기 시작했다.

 

3년이 그렇게 지나자 묘목은 제법 혼자 힘으로 잡초를 이겨내며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나무의 세계에서는 4 더하기 1은 5가 아니었다. 5년 차 나무는 이른바 탄력을 받기 시작하여 한 해가 지나면 4 더하기 1은 7이 되고 8이 되기도 하는 신비를 체험했다. 이제는 너무 밀식(密植)된 묘목들을 3배 넓이로 옮겨 심어야 했다.

 

나무가 자라는 데는 햇빛과 바람과 물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무를 옮겨 심다 보니 땅속에 그렇게 많은 지렁이들이 뿌리 주변에서 공생의 꿈틀거림을 하고 있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박목월의 시에 나오는 ‘눈먼 소녀가 문설주에 기대어’ 봄을 맞는 ‘송홧가루 날리는 윤사월’이 되면 모양을 다듬는다고 일일이 반송 새순을 중간 정도 잘라주다 보면 며칠은 짙은 솔 내음에 취하기도 한다.

 

다음 해 봄에는 잡초전쟁에서 벗어나고 싶고 과실을 일찍 볼 욕심으로, 큰돈을 들여 10년생 주변의 매실나무, 밤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대추나무 50그루를 심었다.

 

열매를 얻자고 들면 매실(梅實)나무라 부르고, 꽃을 감상할 목적이라면 매화(梅花)나무라 부른다지만, 나는 이 나무를 유달리 좋아한다. 봄의 화신을 전하는 꽃도 좋고, 현충일 주변에 영그는 토실토실한 청매실의 열매도 좋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잔설 속에 피어나는 그 의지를 높이 사 설중매(雪中梅)라고 상찬한다. 꽃망울을 터트리기 한두 주 전쯤, 매화나무 줄기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면 선홍빛이 감돌다가 차츰 짙은 핏빛으로 절정에 올라 토실토실한 꽃망울에 양수가 터지듯 꽃잎이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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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집의 매화나무

 

 

버들강아지가 눈을 뜨려 하고 꽃샘추위라고 호들갑을 떨 무렵이면 가장 먼저 푸른 잎을 내미는 상사화의 모습에서 겨울공화국의 종언을 알리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자연의 작은 역사의 한순간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입하(立夏)가 지나고 한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어느새 그 왕성한 푸르름의 잎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 우뚝 솟은 꽃대에 빨간 화사한 꽃이 핀다. 잎과 꽃이 서로 보지도 못하는 그리움으로 상사화의 이름을 얻었다지만, 이 꽃 하나를 지상에 밀어 올리려고 잎들은 그렇게 초봄부터 일찍 푸르렀던 모양이다.


나무 동네를 한 10년 헤매다 보니 작은 변화가 생겼다. 추사 세한도(歲寒圖)의 영향이었는지 한겨울을 늠름하게 견뎌낸 송백(松柏)의 늘 푸른 기상에 흠뻑 빠져 그동안에는 눈에도 차지 않았던 낙엽 지는 활엽수를 이제는 더 좋아한다.

 

애면글면 세속 인연의 실타래를 놓지 못하고 허우적대며 마음 상해하지도 않고, 가을이면 찬연한 단풍의 오케스트라를 끝으로 한 해의 잎사귀를 훌훌 털어버리는 매몰찬 포기가 부럽다.

 

감출 것도 없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이 낙엽을 떨군 본래의 수형(樹型)을 겨울 하늘가에 그림처럼 펼쳐놓고 한겨울 삭풍을 벌거숭이 온몸으로 견디어내는 나목(裸木)의 용기는 어디서 연유하는지가 궁금하다.

 

봄이 시작되면 연초록 참새의 혓바닥 같은 작은 새싹들이 새카만 나무줄기를 뚫고 또 한 해의 우주를 경험하는 신비한 모습들이 그렇게 귀엽고 예쁘다.


 

아름다운 숲을 꿈꾸며


군부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사회상황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서 출판언론을 선택했기 때문인지 천둥벌거숭이의 문화운동가에게 기득권을 확보한 상인들의 질서는 더욱 냉혹했다.

 

도시의 사냥꾼들이 더 많은 이윤창출을 위해 격돌하는 콘크리트 숲에서 부딪치는 인간의 탐욕에 실망할 때마다 태고의 원시적인 바람과 향기가 넘실대는 거대한 나무의 숲을 만들어 그곳에 포근히 안기고 싶은 야무진 희망을 꿈꾸었다.

 

가야 할 길은 절반도 가지 못했는데 이만큼이면 출판언론에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부추김에 덩달아 생기는 건방진 마음을 잠재워야 했다. 정치권력이 몇 번씩 바뀌면서 민주화 세력이 세속권력의 문고리를 잡았다. 우리들 꿈인 사회개혁은 외면하고 그 잘난 책장수만 계속할 거냐면서 손에 잡힐 듯한 작은 권력의 자리에 동참하자는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이때마다 내가 가는 길에 희망을 걸며 중심을 잡으려고 묘목밭을 일구는 노동을 자청해 자신을 학대했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나를 지켜내 주는 그 이상의 상징이기도 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우주도 없어지겠지만, 한 지식인이 묻히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데, 눈앞의 이익에 핏발 선 탐욕의 눈동자들을 외면하는 길은 밀린 원고 더미 속에 푹 파묻히거나, 자라는 나무들과 대화하는 일로 스스로를 내몰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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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수목원의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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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입구의 어느 봄날. 산벚과 어울린 진달래의 우아한 참꽃이 <토지>의 별당아씨가 만들었던 화전의 향기에 녹는 듯하다.

 

 

책 속에 묻혀 30년이 다 되어가자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최초의 독자로서 원고를 읽는 기쁨이 가장 컸다. 창조적 지식인을 지향하는 독자군이 형성되어 내가 느낀 책의 향기를 공유하는, 화답의 미소가 짙게 반향되는 소리 없는 환호성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원고는 내가 읽어내야 출판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모니터에 혹사당하는 눈 때문인지 집중력이 떨어지는 체력의 한계로 과욕이라는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출판언론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강불식(自彊不息)으로 치닫는 길에 인위적으로라도 쉴 수 있는 전혀 다른 활력소를 마련해야 되겠다는 깨달음의 실천이 나무 심는 일이었던 것 같다.

 

출근길 한강변 둔치에 자생하는 버드나무 줄기에 물이 오르면서 날마다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짙어지는 봄 색깔의 변화하는 채색도를 지켜보는 기쁨에 겨우내 웅크렸던 어깨를 편다. 아무래도 이 초록빛의 향연은 한강의 물결치는 배경에 투영(投影)되어 더욱 상큼하다.

 

봄날이 그렇게 오고 있다. 한 주일 뒤에는 경기북도의 우리 수목원에서 이 찬란한 생태계의 꿈틀거림을 재확인해 보는 것이다.

 

연필화 같던 느티나무의 작은 가지에 청맥(靑脈)이 솟구치고, 얇은 한지의 껍질을 벗어내던 백설탕 같던 자작나무 줄기에도 체로 거른 맑은 황톳빛이 돌기 시작한다. 그렇게 처음 맞는 봄은 이미 와 있다.


‘눈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대답보다, ‘눈이 녹으면 봄이 온다’가 더 자연을 읽는 깊이가 있다. 그래서 봄은 푸르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색깔로 온다.

 

개나리와 산수유, 생강나무, 히어리의 노란 꽃이 봄의 서장이라면, 이제 새싹의 연두색과 아우르는 진달래나 영산홍, 철쭉, 금잔디가 흐드러진 산벚의 꽃비 속에서 핏빛을 토해낸다.

 

달빛에도 팥배나무, 야광나무의 하얀 꽃이 산천을 뒤덮고, 연분홍빛의 모과, 살구, 매화, 앵두꽃이 합창하면 하얀 목련꽃 그늘에서 친구에게 편지라도 쓸 일이다. 아까시나무와 밤나무의 오묘한 짙은 꽃향기를 맡고 입하(立夏) 무렵에 이팝나무가 하얀 꽃을 쌀밥처럼 매달면서 그렇게 봄날은 간다. 삼복더위 끝 무렵 회화나무의 하얀 꽃이 핀다. 녹색이 지친 잎들을 깔고 핀 작은 꽃무덤이 앙증맞다.

 

일부러 심지도 않았는데 지천으로 피어나는 싸리나무의 빠알간 꽃숲이 백일홍의 쌔빨간 꽃보다 선명하지 않지만 한여름을 견디기에는 충분하다. 배롱나무가 크지 못하는 추운 북부지방에서는 이 싸리나무의 꽃으로라도 만족해야 한다.

 

가로수도 권력인 모양이다. 조선시대의 한적한 길에 이정표 삼아 오리마다 심었다는 오리나무나 밤길을 밝히려 심었다는 야광나무가 가로수의 효시였지 싶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식민지 지배의 효율성을 위해 먼지 날리는 신작로의 개설과 함께 심어진 속성수인 이태리포플러 길을 시작으로 메타스퀘어 길로 바뀐다. 가로수에서 일제의 잔재를 벗어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성장과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한여름 그늘을 주고, 자동차 소음을 완화시키고 아름다운 경관을 주는 가로수에 대해서도 눈길을 주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우선 신작로 길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변한다. 버즘나무(플라타너스), 은행나무가 대종을 이루는 가로수 길이 일상화된다. 가끔씩은 버드나무가 등장하여 풍류를 더한다.

 

아무래도 대변혁은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고품격인 느티나무가 88 강변도로에 대거 등장한 일일 것이다. 이제 느티나무는 전국적으로 가로수의 왕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쌀 뒤주에서 인심이 나듯이 가로수도 사치를 시작한다. 최고의 사치는 귀하다는 소나무가 가로수로 등장한 데 있다. 일본 국목이라는 벚나무도 원산지가 제주도의 산벚이라는 주장에 힘입어 전국도로에 벚꽃이 필 정도로 국민들의 정서에 여유가 생겼다. 대왕참나무, 목백합이 선을 보이고, 청계천의 물줄기가 복원되면서 이팝나무가 청계천변 가로수로 자태를 뽐내면서는 회화나무와 함께 전국으로 확산된다. 지난달에는 귀한 노각나무를 세종시 가로수로 심었다가 실패했다는 보도도 있다.

 

그때그때의 권력자나 단체장들의 나무에 대한 안목이나 호불호에 따른 것이라고 하나 시민들의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 가로수의 수종 선택권은 엄청난 권력임이 틀림없다.


3년 전부터 시작한 20만 평이 다 되는 포천 신북의 나남수목원 조성은 5리가 넘는 맑은 실개천과 함께, 쉽게 50년이 넘는 잣나무, 산벚나무, 참나무 숲과 백 년이 넘는 산뽕나무, 팥배나무, 쪽동백이 있어 그 숲에 들어가면 태고의 음향에 취할 수밖에 없다.

 

수목원 곳곳에 15년의 나무 심는 아마추어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시작하는 헛개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묘목장을 튼튼하게 가꾸고, 개미취, 분홍바늘꽃이 광활하게 춤추는 야생화 꽃동산도 마련하고 있다.


허락된다면 귀천(歸天) 전까지 한 2∼30년은 햇볕을 다툼하는 녀석들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서라도 간벌과 가지치기를 계속하면서 거목으로 성장하도록 자식 키우듯 정성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숲에 묻히고 싶다. 웰 다잉(well dying)의 일환으로 수목장 실천운동이 일듯 꽃밭과 파란 잔디와 우리 나무들 밑에 묻히고 싶다.

 

그렇게 큰 욕심일까. 많은 친구들이 그곳에서 영생을 같이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지?



이 원고는 2011년 4월호 〈신동아〉에 실린 글을 보완한 것으로, 몇 사람의 글과 함께 ‘나의 버킷 리스트’라는 별책부록 형식의 소책자로 발간되었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을 때는 이런 기획의도를 듣지 못했으나, ‘버킷 리스트’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는 사전적 의미라면, 나무 심는 일이 나의 버킷이라는 너무 장엄한 목표를 세운 것 같아 쑥스럽기도 했다.

 

경제가 호황이라고 해도 출판동네에는 그 온기가 맨 나중에 오기 마련이지만, 이제는 경제가 불황이라고 하니 책을 팔아 나무를 심는 일이 차츰 벅차게 되었다. 그러나 나무 심기는 계속되어야 했다.

 

3년 전에 우리 토종이라 더욱 의미가 있는 구상나무 4년생 묘목 1천 주를 호기 있게 키워 보려다 실패했다. 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워낙 더디 자라기도 하고, 수목원 자리 배치를 다시 하면서 옮겨 심다 보니 그리되었는데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침 운이 좋게도 금년 3월 수목원 옆 동네의 문중 땅 2천 평에서 오랫동안 자라던 3백여 그루 나무들을 몽땅 인수하게 되었다. 잘 자란 30년이 넘는 구상나무, 종비나무 20여 그루와 회화나무 4그루에 선뜻 마음이 갔다. 나머지 나무는 덤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기뻤다.

 

작년 늦가을 은행나무 터널을 꿈꾸며 15년생 은행나무 4백 그루를 심은 데 이어, 한탄강 댐 공사로 물에 잠기게 될 50년생 느티나무 8그루를 옮기면서 고생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두 달 동안 이들을 굴취하여 이식하는 데 바빠 봄이 무르익는지도 몰랐다.

서울 성북동 꼭대기 양지바른 5천 평에 필생의 꿈인 웅장한 ‘세종 돌 박물관’을 완공하는 천신일 회장께서 느티나무를 그렇게 좋아하셔서 7그루를 키우시라고 보내 드렸다.

 

50년이 넘는 느티나무, 단풍나무 30여 그루와 눈주목 1백 그루, 목련 60그루, 측백 5그루, 오엽송 4그루와 거목이 된 라일락, 보리수, 자귀나무, 산뽕나무, 애기사과, 향나무, 회양목이 아름다운 숲을 꿈꾸는 우리 수목원의 새 식구가 되었다.

 


회화나무의 추억


회화나무는 선비목이라고도 불린다. 이 나무를 통해 선비정신을 기르고자 하는 자신의 성찰이기도 하고, 중국의 영향으로 회화나무 꽃 필 때 치러졌다는 과거시험에 입신출세하려는 마음으로 아들을 낳으면 집 앞에 이 나무를 심기도 했다고 한다. 창덕궁에 들어서면 왼쪽에 거목이 된 회화나무를 볼 수 있다.

 

충남 서산시 해미읍성 안에는 6백여 년생 회화나무가 있다. 조선 말 병인(丙寅)사옥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죽였기 때문에 ‘교수목’(絞首木)이라 불리기도 한다. 해미읍성은 한 그루의 ‘교수목’으로 아름다운 성(城)일지 모른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슬픔을 같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출판사에서 지난 15년 동안 어렵지만 올곧은 사업으로 펼치는 '지훈문학상'을 수상했던 나희덕 시인의 〈해미읍성에 가시거든〉이라는 시를 다시 읽으며,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에 실린 시인의 애정을 나누어 갖는다.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실 일입니다

가시 돋친 탱자울타리를 따라가면

먼저 저녁해를 받고 있는 회화나무가 보일 것입니다

아직 서 있으나 시커멓게 말라버린 그 나무에는

밧줄과 사슬의 흔적이 깊이 남아 있고

수천의 비명이 크고 작은 옹이로 박혀 있을 것입니다

나무가 몸을 베푸는 방식이 많기도 하지만 하필

형틀의 운명을 타고난 그 회화나무.

어찌 그가 눈 멀고 귀 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손끝은 그 상처를 아프게 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 걸어가 또 다른 나무를 만나보실 일입니다

옛 동헌 앞에 심어진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 드물게 넓고 서늘한 그늘 아래서

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잊은 듯 웃고 있을 것이고

당신은 말 없이 앉아 나뭇잎만 헤아리다 일어서겠지요

허나 당신, 성문 밖으로 혼자 걸어나오며

단 한 번만 회화나무 쪽을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그 부러진 나뭇가지를 한 번도 떠난 일 없는 어둠을요

그늘과 형틀이 이리도 멀고 가까운데

당신께 제가 드릴 것은 그 어둠뿐이라는 것을요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5년 전 정동으로 이사하면서 출퇴근 때 예원학교 옆 캐나다 대사관 앞의 550년 된 회화나무를 볼 때마다 나도 저런 나무를 수목원에 남기고 싶은 욕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 새 식구가 된 40년생 회화나무 3그루를 책박물관 앞 호숫가 관리동 앞과 정자 옆에 옮겨 심으면서 나 떠난 다음에도 몇백 년의 푸르름이 그 옆의 느티나무와 어울려 계속되기를 꿈꾸었다.

 

세상에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나도 나무처럼 늙고 싶다.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이겨낸 뒤에 얻어진 초월과 해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무처럼 아름답게 늙고 싶다면 당연히 나무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나무처럼 살고 싶지 않으면서 나무처럼 늙고 싶다고 해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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