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은의 아침〉의 시인
작성일 : 08.09.03   조회수 : 1610

〈순은의 아침〉의 시인



오탁번 선배의 정년(停年)을 축하합니다. 몇 년 전부터 나를 만날 때마다 대학 관두고 글쓰기에만 매진하겠다고, 항아리 큰 독 속에라도 숨고 싶다고 되뇌더니, 정작 그 끈을 놓고 나니 조금은 허전하시지 않은지요. 연자방아 돌리는 허망한 반복 같던 그 두레에 걸렸던 끈이 말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오 선배의 교우회관 정년기념 출판식장에 갔다가 큰 책 두 권을 그냥 받았던 당혹감이 생각납니다. 여느 출판기념식과 다른 신선한 충격과 오 선배답다는 확신을 같이했습니다. 미안하기도 하구요. 500부 한정판 《입품 & 방아품》(얼른 이해되지 않는 제목입니다만) 제005호를 형의 친필 옥쇄와 함께 받았습니다. 《시(詩) 읽기―헛똑똑이의》는 전문서적 같기도 합니다만 ‘헛똑똑이의∼’의 표현은 마음에 걸렸습니다. 문학청년들이 꿈에 그리는 신춘문예를 시․소설․동화로 3관왕을 이루신 분이 그 연세이시면 자랑하신들 어떻겠습니까마는 아직도 겸손하신 모습 그대로입니다.


문학적 자전(自傳)을 밑줄 그으며 한참 읽다가 16년 전 저희 출판사에서 펴낸 오 선배의 문학선 《순은(純銀)의 아침》 글을 읽고는 정말 죄송하다는 가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많이 외로우셨던 마음을 이제야 헤아려보는 듯싶습니다.

그리하여 쇠똥구리처럼 살아온 소외와 고독의 방법을 버리고 좀더 광활한 대지를 향하여 눈을 크게 뜰 법도 한데 ― 그동안의 내 삶과 내 이웃의 사랑을 되돌아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도 숨길 수 없다 ― 배고픔과 가난 속에서도 순은이 빛나는 아침을 기도하며 여기까지 왔다 ― 다시 아득한 길을 나선다.

오 선배님, 비교(秘敎)의 교주(敎主)를 꿈꾸었댔습니까. 밀교(密敎)의 카리스마와 신비감을 실천하시고 싶었습니까. 귀기(鬼氣)가 서린 교주같이 말입니다. 원서당주(遠西堂主)의 절대자의 산에서 조금도 하산(下山)하시지 마십시오.


이 반도의 중심 ― 원주(原州) ― 배꼽에 자리하신 그곳 원서(遠西)에 한번 들르고 싶습니다. 거인(巨人)의 또 다른 모습은 어떠한지 꼭 확인하고 싶은 망상이지요.


저는 형이 일러주신 대로 또 “나가자 폭풍같이 … 장안을 뒤흔드는 젊은 호랑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태양(太陽)을 향해서. 젊은 날의 뛰는 심장이, 젊은 꿈 뛰는 혈관이 ― 형이 불러주신 노래였으니 말입니다. 고려대와 오탁번 그리고 접니다. 형도 큰 졸업 하시는데 저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황홀한 만남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강건하십시오.

 

《언론 의병장의 꿈》(나남, 2009), pp.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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