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단풍은 대합창이다
작성일 : 14.11.03   조회수 : 1364

매일신문 | 2014. 11. 3.

 

[계산논단] 단풍은 대합창이다 


 

누이가 서성거리는 장독대에 날아드는 붉은 감잎 한 장에서도 가을이 무르익는다. 김영랑 시인의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가 그것이다. 숲이 그러하듯 누이는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다. 산골짜기의 맑은 물 위를 가로지르는 단풍잎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기 시작하면 가을이다. 식상한 보도 관행이지만 설악산 단풍놀이의 구름 떼 같은 인파의 무질서 보도도 뒤따른다. 많은 사람이 몰리는 데 한자리 끼지 못하면 소외되는 것 같은 불안한 심리를 잠재우려 뻔한 고생을 집단적으로 자처하는 우리들이다. 자연은 도처에 사람들이 어떻게 보건 상관없이 숲향기 그대로의 단풍이 무르익는데도 말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


단풍은 색깔의 대합창이다. 단풍은 빛의 축제이다. 햇빛을 더 잘 받기 위해 잎차례의 각도와 방향까지도 감안했던 그 잎들이 지려고 한다. 나무는 이제 겨울나기를 위해 나뭇잎이 가지에 연결된 곳에 떨켜층을 만들어 수분공급을 막아 잎을 떨구어야 한다. 나뭇잎은 봄부터 여름 한 철 나무를 키운 광합성을 하던 초록의 엽록소를 덜어내고 단풍이란 이름으로 본연의 색깔을 드러낸다. 자연이 뿜어내는 색깔은 다양하다. 낙엽이 되어 땅으로 회귀하기 직전이어서 그 화려함은 절정일 수밖에 없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해져서 그렇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낙화의 꽃비는 건강한 열정의 녹음이 준비된 희망의 아름다움도 있다. 낙엽이 예비된 단풍은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선비의 가을앓이[秋士悲]는 어디서 연유하는 걸까.  


단풍은 단풍나무 하나의 색깔이 아님은 물론이다. 숲 생태계가 전이를 계속하면 소나무, 참나무류 다음으로 단풍나무가 마지막을 차지한다니 해마다 단풍은 짙어갈 것이다. 단풍색깔이 붉기로야 새싹부터 불그스름한 홍단풍이 으뜸이다. 복자기 단풍과 화살나무 단풍도 화사하고 예쁘기 그지없다. 그 뒤로 당단풍, 신나무, 고로쇠나무, 붉나무, 산벚나무, 서어나무가 뒤따른다. 노란색이 눈에 띄는 은행나무, 아까시나무, 회화나무, 자작나무, 느티나무, 히어리와 숲의 절반이 넘는 참나무류 5형제의 단풍이 더해진다. 물푸레나무, 밤나무, 싸리나무 단풍은 아무래도 중간색이다. 상록수인 소나무나 잣나무의 낙엽인 갈비는 덤이다. 여기저기 새카맣게 죽은 고목과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 은빛이 더해가는 자작의 나목 색깔은 어떠한가. 이 색깔들이 서로 어울려 대합창을 하면서 단풍의 색깔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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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풍사실 정자 옆 홍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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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남수목원 책 박물관 건너편 계곡의 단풍

 

 

감동스러운 합창은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자신 있게 내면서도 서로 어우러질 때 그 이상의 화음을 이룬다. 자연의 합창도 빨강, 노랑, 하양, 초록, 검정, 갈색 등 자신의 색깔을 자신 있게 전부 쏟아내면서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숭고한 것이다. 중간 중간에 바위의 맨얼굴과 맑다 못해 청아한 가을 물과 일교차가 큰 바람과 구절초, 쑥부쟁이의 들국화가 짝하면 더할 나위 없는 가을 산의 대합창이 절정을 향해 달린다. 서정주 시인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하늘이 한없이 높아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너나없이 자신의 색깔대로 열심히 살도록 배려하고 양보하는 착한 공동체를 이룰 단풍의 대합창 같은 대동(大同)사회를 꿈꾸는 그리움은 우리들의 몫이다.


한 해의 끝은 섣달그믐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숲의 한 해는 새싹이 트는 봄으로 시작하여 단풍으로 마감한다. 나무는 낙엽을 떨구어낸 가지 끝에 겨울눈을 남겨 찬란한 봄을 예비한다. 숲은 나목의 키만큼 낮아져 품에 안긴다. 상록수인 장송들이 그 키만큼 원래의 높낮이로 돌아간 숲의 겸손함을 증언한다. 늦가을 고즈넉한 낙엽길이라도 밟으며 단풍의 대합창을 추억해야 한다. 나는 대동사회를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사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잎을 떨구고 맨살로 정직하게 인고의 겨울을 넘기는 나무의 겨울눈에서 찬란한 봄의 환희를 찾기 위해서라도 겨울 숲에 가야 한다. 나무도 우리처럼 외로움을 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상호 | 나남출판 회장ㆍ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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