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의 황홀한 《삼국지》
작성일 : 13.08.27   조회수 : 1386

여기자의 황홀한 《삼국지》

 

 

삼국지를 다시 펴든다.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이 편작(編作)한 《여류(余流) 삼국지》 전 5권을 삼복더위의 대항마로 삼아 단숨에 읽어냈다. 자꾸 왜소화하고 메말라가는 두뇌에 고전 다시 읽기의 폭풍 희열을 선사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공명을 다투는 조직 내 인간의 삶과 처세를 2천 년 전의 삼국지 스토리에 얹어 지금 여기의 시대정신에 맞춘 공들인 보기 드문 역작이다. 작가의 현란한 언어의 마술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통통 튀는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많은 상상력의 꿈을 꾸게 한다. 이렇게 우리의 잘난 상식을 부끄럽게 하는 글쓰기의 조그마한 비틂에도 우리는 유쾌한 배반의 늪에서 행복한 유영을 할 수 있다.


지금 다시 《삼국지》여야 하는가

오랜만에 다시 읽은 《삼국지》는 포커페이스의 달인인 몰락한 집안 자손 23세 현덕, 그 원천을 알 수 없는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외로운 도망자 청년 관우, 다혈질에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고아 소년 16세 장비, 이 세 청년이 도원결의하여 천하를 도모하는 전장터를 누비는 40년간의 꿈이야기[夢]에 다름 아니다.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면서도 세상에 굴종하지도 못하는 강한 성정을 타고난 불우한 청년들에게 유일한 야망은 기존의 질서와 상관없는 자신들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리라. 사교와 인맥으로 세를 형성하는 중앙 엘리트들은 타고난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우아한 예의범절과 풍류로 자신의 영역을 더욱 넓힐 수 있었으나, 변방에서 온 마이너리티들에게는 몸을 사리지 않는 저돌성과 권력자들에 대해 몸을 던지는 아부의 기술이 처절한 정치무대에서 생존케 하는 핵심역량이다. 또 ‘외로운 승냥이’ 전략으로 때로는 무섭게 때로는 더럽게 굴어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은 하나도 뺏기지 않고, 빼앗은 자에겐 반드시 보복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날을 세워야 비로소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다. 해서 도움이 될 자와 아닌 자들을 가려내는 동물적 감각을 가져야 하는 것이 삶의 비책이다.

말도 오랫동안 반복해서 하면 신념이 되고 위선도 오래 하면 진정성이 된다고 하지만, 세 청년의 야망과 꿈은 천하 통일이라기보다는 1/3 천하라도 족한지 모른다. 다만 지금도 시대상황의 무대만 바꾼다면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들의 생사를 넘나들며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우정이 소용돌이치는 울림을 준다. 해서 천하경영을 위해 치닫는 그들의 자식 세대나 제갈공명, 조조, 손권, 사마의 등은 모두 조연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욕망으로부터 시작한다

원래 사람의 마음속엔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더러운 생각이 많기에 누군가 내 생각을 읽는다는 걸 알게 되면 누구나 그를 미워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천 년 전의 시대상황이 밑그림으로 깔렸기도 하지만 아직도 동양적 사고방식의 틀을 탈각(脫殼)하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한다면 권력과 탐욕,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고난의 행군은 지금 오늘의 우리에게 아직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이 벤처기업에 승부를 거는 창업자거나 권력의 주변에 기생하면서 항상 햇볕만을 도모하는 모리배들이거나 거대조직의 톱니바퀴 노릇을 하면서도 리더십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거나 모두에게 해당될 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 권력에의 의지를 전수받거나, 인간 경영학의 에센스를 뽑아내거나, 인생훈(人生訓)이나 처세술의 달인 흉내를 배우겠다는 얄팍한 계산보다는 슈퍼우먼 저널리스트인 작가가 장쾌하게 이끄는 대로 그이의 사자후(獅子吼)를 받아들이면 된다. 동의하시거나 시큰둥하시거나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원래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데는 욕 먹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욕을 먹을 때 웃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위대한 길로 갈 수 있는 법이라는 작가의 천둥 같은 죽비를 맞으면서도 내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불안한 가까운 미래의 틈이라도 엿보고 싶은 조바심 때문인가 싶다.
이전글 [명사 에세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다음글 미처 못다 부른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