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선생
작성일 : 09.08.04   조회수 : 1631

이청준 선생

 

 

이청준 선생이 돌아가셨다. 2008년 7월 31일이 그날이다.


중복(中伏) 이틀 지난 삼복 더위 중에 폐암 발병을 알고 죽음을 디자인한 지 1년 만에 편안하게 《당신들의 천국》에 그 대작가가 직접 입성한 것이다. 영결식장에서 사모(남경자) ― 은지 어머님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 께서 전한 마지막 모습들은 이러했다.


1년 전쯤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선생께서는 손을 꽉 잡으시더니 “여보, 놀라지 말게. 몸이 무중력상태인 것처럼 붕 떠 있네. 어지럽고 중심을 잡을 수 없구먼”이라고 했다.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뇌 신경과 연결된 귀속의 달팽이관이 말라붙어 중심을 잡지 못하는 줄 알았다 한다. 병원의 정밀검사 결과 폐를 뒤덮고 있는 암의 종양들이 전이되어 이미 뇌세포의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수술하려 해도 집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받는 견디기 어려운 항암치료는 몇 달 하다 관두었다. 하루는 항암치료를 받고, 그다음 날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그다음 날 하루만이 그런 대로의 일상이었으나, 또 그다음 날부터는 다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생불여사(生不如死)의 되풀이였으니 말이다.


선생은 임권택 감독과 우정을 나누면서 그의 베스트셀러 〈서편제〉, 〈축제〉에 이은 〈천년학〉의 영상미학에 시나리오까지 떠맡으면서 독자들과의 교감이 영화라는 훌륭한 매체로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었다. 눈먼 소녀의 예술혼이 남도소리의 득음을 통하여 선학동의 신화를 완성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이의 〈눈길〉에 나오는 90을 넘긴 어머니의 장수를 믿기도 했지만, 열정을 불태워야 하는 풍찬노숙의 영화판에서 가끔 이는 밭은 기침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임은 갔다. 다른 직업 없이 오로지 소설 쓰는 일 하나만이 선생의 전부였다. 난숙기의 자본주의 체제에 사는 우리는 이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전업작가’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생이 직업을 가졌던 현장을 확인한 일이 있었다. 1990년 여름 김준엽 선생님(전 고대 총장)의 칠순을 기리는 조촐한 자리를 명동 퍼시픽호텔 일식당 아서원에서 가졌다. 내가 출판했던 《장정 ― 나의 광복군 시절》이 한참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무렵, 생일 챙기기란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시는 엄격한 총장님을 외아들 홍규 선배의 이름을 걸고 무리하게 마련했다. 초대인사는 총장님이 부르신 동지 양호민 한림대 교수뿐이었고 다른 분은 내게 일임하셨다. 낯가리기가 심한 총장님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두 분을 모셨다. 우선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로 당대의 명칼럼을 쓰는 대기자 〈동아일보〉 김중배 편집국장과 〈사상계〉 기자였던 이청준 선생을 모셔 말씀을 나누게 했던 적이 있다. 30여 년 전 〈사상계〉 부주간이셨던 김 총장은 대학을 갓 졸업한 그때의 젊은 기자 이청준을 너무도 반갑게 맞이하며 즐거운 시간을 같이했다.


출판을 시작하는 이들이 꿈꾸는 것은 유명작가의 소설을 출간하는 것이다. 네트워크 사회인지라 학연, 지연 등 모든 연줄을 동원해서 그 작가와 접촉하려고 애를 쓴다. 출판사 이미지를 세우려는 미래의 투자도 있겠지만 기실은 보증수표 같은 영업상 이득이 더 큰 것은 물론이다. 한편으로는 저자도 유명작가가 되는 순간부터 뿌리치기 어려운 의리를 앞세우는 이 인연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지위까지 올라섰으니 이제는 전통 있는 유명출판사에서 책을 냄으로써 같은 출판사의 비슷한 일류 저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취감도 가지면서 튼튼한 마케팅 조직에 실려 수입도 보장받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다.


이 선생과는 고향이 같다. 나는 장흥읍이고, 그이는 읍에서 남쪽으로 70여 리 떨어진 바닷가 대덕면 회진이다. 400년 전 이 충무공이 백의종군하면서 “아직도 12척이나 남았다”(尙有十二)고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시발점의 포구가 바로 이곳이다. 7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수많은 전함을 건조하기에 충분한 산림이 우거졌을 것이고, 그리고 이를 위한 수많은 장인(匠人)과 예인(藝人)들이 함께했을 것이다. 그이도 이 중 어느 장인의 후예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출판을 시작하고 나자 친구들이 “왜 고향선배인 이청준 작가를 찾아가 책을 부탁하지 않느냐”고 아주 명쾌한 듯한 모범답안을 알려주었다. 마음이야 그러고 싶었지만 10년 차이의 그이를 직접 뵌 적도 없는데, 쑥스럽게 불쑥 나타나 고향 후배가 출판사를 차렸으니 잘 팔리는 당신 소설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냥 넘기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은 그이의 삶 일부를 간접 경험한 적은 있다. 1969년 대학입시를 앞둔 재수생 시절 신촌역 밑의 하숙집이 우연히 그이의 고교동창 집이었고 그이도 이 집에서 하숙했다며 자잘한 추억담을 미리 들을 수 있었다. 이 무렵 집필한 그이의 〈소문의 벽〉에서 묘사한 이대 앞 다방의 풍경이 리얼했던 것도 이런 연유 때문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출판사를 시작하고 5년이 지난 1984년이었다. 오생근 형이〈나남문학선〉을 야심 차게 기획하여 홍성원, 이제하, 황동규, 서정인 문학선을 펴낼 무렵 《이청준 문학선 ― 황홀한 실종》을 출판하면서부터이다. 절차만을 따진다면 문학평론가 오생근이 유명작가 이청준을 이제 큰 출판의 뜻을 품은 젊은 출판사 사장에게 소개한 것이다. 주변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자리도 아닌데도 한동안 그이는 나와의 만남에 항상 오 선생이 소개한 사람인 것을 재차 확인시켜 나를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 그이와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말이 어눌하다고도 했다. 고향 이야기나 어머니 이야기를 너무 많이 소설에 등장시킨다고도 했다.


직장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글만 쓰는 전업작가여서 엄청 자유스러운 줄 알았다. 그러나 차츰 사귀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그이는 작은 아파트 안에서 매일 바로 옆방인 집필실로 출퇴근하였다. 자신이 세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통제하는 엄격함이었다. 글쓰기의 어려움과 시대정신에 대한 고민도 차츰 묻어나왔다. 그이는 내 아들을 아주 예뻐했다. 여름 휴가철이면 두 가족이 산천을 찾기도 하고, 진도까지의 남도기행을 하기도 했다. 조금씩 이야기의 넓이와 깊이가 확대되고 정갈스런 사투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초등학교까지 마친 내 고향땅이 바닷가와 그렇게 가까웠다는 사실도 그이가 깨우쳐 주어 알기도 했다. 서울로의 행군에만 몰두했는지 내 몸에 바닷냄새가 그렇게 배어 있었는데도 나는 그때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 고향을 물으면 감히 남도 바닷가라고 하곤 했다. 성장과정이 달랐던 나에게는 심했겠지만 사람과 사회에 대한 그이의 경계심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그이는 박학다식했고, 달변이었으며, 사람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사회에 대한 탁견을 자주 드러냈고, 외아들이 갖는 어떤 권력에의 의지도 있었다. 그러다 곧장 ‘앞바다’와 ‘먼바다’의 차이를 고민하며 젖은 옷을 입은 채 몸으로 말리는 소설가의 성에 숨기도 했다.


그때의 화두는 1980년 5월의 광주문제였다. 지긋지긋한 박정희 때의 전라도 천대가 이제는 광주‘사태’로 우리의 목을 죄고 있었다. 그 치열한 현장에는 없었던 이른바 속세의 성공한 넥타이를 맨 출향인사의 목을 말이다. 광주는 군부의 칼날 앞에서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폭도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의 고향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군부정권이 무너진 나중의 일이다. 우리 고향은 대개 60년 주기로 민중저항의 활화산이 타올랐다. 상대가 왕조였거나, 식민지배자였거나, 군부독재였거나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항상 직접적인 고난을 당해야 하고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저항인 듯이 보였지만 길게 보면 그 불씨는 횃불로 타올라 이 나라의 밝은 빛이 되었다. 우선 19세기 말의 동학농민혁명이 그것이다. 왕조의 탐관오리가 고부지역에서만 유별났을까. 중세의 암울한 장막은 조선반도 전체를 뒤덮고 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농민봉기는 이곳에서 일어났다. 1920년대 말의 광주학생운동도 그렇다. 기세등등한 일제 남학생들의 조선인 여학생에 대한 행패가 나주에서 광주 가는 통학열차 간에서만 자행되었을까. 제물포에서 서울 가는 기차간이나 삼량진에서 부산 가는 기차간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을까. 그러나 학생봉기는 이곳에서 일어난다. 또 60년 가까이 흐른 1980년에는 박정희의 군사독재가 종말을 고하고 고귀하게 쟁취한 민주화의 열풍에 찬물을 끼얹은 신군부에 대한 저항이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 민주화가 이 지역만의 문제였을까. 부산은, 마산은, 서울역은, 광화문은 ‘서울의 봄’의 주체가 아니었는가. 역사의 뒷구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모르는 일임이 틀림없지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는 사람들은 항상 고향사람들이었다.


정초(正初)면 새 희망을 꿈꾼다. 지난 어려움을 떨쳐내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이 있기를 희구하는 것이다. 못된 권력에 가위눌려 질식할 것 같은 광주에 숨 쉴 만한 공간을 본능적으로 찾는다. 엄동설한의 밤길을 헤치고 섣달 그믐날 밤에 무등산에 올라 입석대 앞의 널따랗게 펼쳐진 억새밭에 불을 놓는 의식이 그것이다. 세찬 겨울바람에 실린 이 불길은 끝없이 질주한다. 이 불길에 한 맺힌 마음을 실려 보내기도 하고, 미움을 용해시켜 보려고도 하고,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찾아야 할 희망을 조심스럽게 키워보기도 하는 것이다. 억눌렸던 마음을 고함으로 대신해도 좋았고, 새 희망의 환호작약도 이 불길이 짝하여서 좋았다. 무등산 정상 부근의 차가운 겨울바람도 계엄군의 칼날이 아니어서 견딜 만하고, 서로 이름은 모르지만 목숨을 걸고 항쟁에 참여했던 동지의식만으로도 이 억새밭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또 다른 불기둥이 서로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음을 안다. 이것으로 해원이 다 되지는 않겠지만 또 일 년 열심히 살고 내년 정초에 또 보자는 눈짓을 나누며 이 의식을 끝낸다.


이 이야기를 그이에게 들려주었다. 금년 말에는 이 제의에 동참하러 무등산 산행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연말이 다가오기도 전에 〈비화밀교〉라는 중편소설 원고를 보여주었다. 아! 소설이라는 장치는 얼마나 예술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인가. 그것은 무등산의 비밀스러운 불꽃 밀교의식에 관한 내용을 훌륭히 담고 있었다. 소재를 주었던 나는 소설 속에 향토사학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는 서울에서 지식인 작가로 연명하면서 항쟁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 고향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예의를 보여주면서 자신을 짓눌렀던 공포와 부끄러움을 불태워버리는 씻김굿으로 승화시켰다. 그 시절에는 광주항쟁을 이런 우회적인 수법이라도 발표하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저항이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는 보이지 않는 힘과 힘의 질서에 대한 끈질긴 저항과 함께 화해와 용서의 제안도 조심스럽게 드러내었다. 1985년 내가 출판한 이 책은 다음 해 대한민국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산문집 《말없음표의 속말들》을 출간하고서는 그이에게 전작 장편을 부탁했다. 1989년 봄에야 〈자유의 문〉 신작 원고를 받고 출판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추상같은 칼럼으로 장안을 흔들던 김중배 선배가 출판국장으로 있던 여의도의 〈신동아〉에 자주 들렀다. 그런데 황석영 씨가 갑자기 평양에 들어가 그의 연재소설이 펑크나 김종심 부장이 애를 태웠다. 이 잡지는 이청준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소록도 이야기 〈당신들의 천국〉이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인연이 있었다. 이런 사정을 이 선생과 상의해 따끈따끈한 신작 장편으로 시장에 내놓으려던 인쇄 직전의 이 소설을 이 잡지에 집중 분재하도록 했다. 내가 양보함으로써 여러 사람이 편하게 되었다. 망외의 상당한 원고료를 전해드리던 날 계면쩍어하던 그이의 모습이 생각난다. 연재를 마치고 11월에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자유의 문〉은 “숨음과 드러냄 사이의 어둠 속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바늘구멍만 한 사랑이라는 통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리 팔리지는 않았다.

이 무렵 삼복 더위 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는 어머니의 다급한 말을 듣고 고향에 갔다가 결국에는 임종까지 지켰다. 선산에 모시고 서울로 와서야 이청준 선생이 서초동 출판사에 직원들을 진두지휘하여 분향소를 마련하고 나 대신 조문객을 받았음을 알았다. 황망 중에 처음 겪는 상사를 나 혼자 감당하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3일장 내내 그이는 궂은일을 자청해 상주 노릇을 하신 것이다. 고마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사람 사는 일이 이런 것인가 하는 미안한 마음의 빚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또 20년이 지나면 나는 그이의 고향 회진 진목리 마을회관 앞 그이의 영결식장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어야 했다. 오로지 그이 하나만을 위하여 대한민국 대표 소설가의 아내로 한평생을 헌신한 사모의 탈진한 통곡이 가슴을 후볐다. 딸애 친구인 어린 은지를 이 거친 세상에 유일한 혈육으로 남기고 그이는 그 뜨거운 여름의 열기 속으로 갔다. 아! 그때 회진만의 갯바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청학동 나그네가 가는 길에 학 몇 마리가 그이를 모시고 승천을 위한 비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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