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4반세기
작성일 : 04.08.01   조회수 : 1865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나남출판 4반세기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4반세기였습니다. 나남출판사가 창업 25주년이 되었습니다. 그 삶의 역정이 스스로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건, 작은 투쟁의 역사였다고 자위하건 연약한 존재가치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하기는 훌륭한 일을 하고서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허허롭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이 사회를 있게 했습니다만, 출판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인쇄매체를 직업 삼아 보낸 시간들이었기에 몇 자 적어보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지성의 열풍지대 ― 처음 출판을 시작하면서 사상과 자유가 편견 없이 교통할 수 있는 그런 열린 공간을 꿈꾸었습니다. 맨 처음 만든 출판사 도서목록의 제호이기도 했습니다. ‘지성과 야성의 조화’라는 화두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젊은 날을 보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성은 아직도 칼집에 녹슬어 있고, 야성은 머리 깎긴 삼손처럼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쓰기가 땅을 경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같다고도 합니다. 책을 만들어 세상에 펴내는 일이야말로 정말 가난한 농부의 마음과 다름없습니다. 황무지 산비탈에 젊은이가 삽 한 자루 들고 뛰어들었습니다. 묘목을 심고 물을 줘가며 울창한 지성의 숲을 꿈꾸었습니다. 지금 나무를 심으면 손자 대에라도 과실을 거둘 수 있다는 독림가의 말을 믿으며 나의 길을 갔습니다. 문전옥답을 탐내지 않아서인지 동업계의 시샘이나 질투를 받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일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형이 선택한 길은 항상 옳은 줄 알고 젊음을 쾌척하며 응원해준 후배들의 땀 냄새는 지금도 눈물겹습니다. 편한 길이 많은데도 안될 일을 사서 고생한다거나, 무모한 짓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꿈을 설명하기에는 현실의 벽이 높았고 또 그럴 필요도 없겠다 싶어 아예 귀를 막고 눈을 감기로 했습니다. 다만 진흙밭에 연꽃을 피우자는 꿈도 아니었는데도 묵묵히 이 길을 함께한 평생 도반인 아내와, 없는 것을 찾기 위해 그렇게도 젊은 날을 함께 고민하며 뒹굴고 이제는 그들이 나남을 대표할 수밖에 없는 나남식구들인 임건석 전무이사, 한기우 이사, 방순영 편집장, 이필숙 디자인실장, 김선양 총무과장 등 여러분에게 이런 자리를 빌려서라도 감사의 고개를 숙입니다.

여름에 쏟아진 폭우로 골이 패진 곳엔 사방용으로 속성수도 심어야 했지만 한참 지난 다음에는 계획림 조성에 방해가 되어서 이를 다시 캐내기 위해 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방풍림의 용도로 큰 나무들을 옮겨심기도 했습니다만, 어린 묘목을 보호하기는커녕 고약한 타성으로 떠받듦이나 받으려 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초록색만으로도 반갑기도 했던 잡초는 왜 그리 빨리 무성해 오히려 주인 노릇을 하는지요. 환경을 걱정해야 하는 입장에서 남들처럼 제초제를 뿌릴 수도 없고 매년 서너 차례의 풀베기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수종선택에서도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자신의 뜻이 강고하지 못하면 전혀 책임도 없는 남의 말에 휘둘리기 십상이지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자연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먼저 성찰하지 않고 내적 충실도 없는 탐욕의 싹을 미처 살펴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욕심을 부릴 걸 부려야지’ 했던 아버지 말씀처럼 혀는 짧은데 침은 멀리 뱉고 싶은 조급함이었겠지요. 물 많은 곳에서도 잘 크는 나무인지, 햇볕을 잘 받아야 잘 자라는지를 몰라 빨갛게 타들어 가는 나무를 붙들고 낙담하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지나고 나면 백면서생(白面書生)인 농부가 겪어야 할 당연한 길이었는데도 그 과정은 그렇게 마음이 아리고 이 길이 내가 가는 바른길인가라는 회한의 밤에는 시지망월(視指忘月)의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내가 가야 할 북극성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10여 년이 지나자 100여 그루의 나무들이 자라나 어렴풋이나마 언론학이라 부를 수 있는 숲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언론학이 사회과학의 한 영역으로 늠름하게 자리 잡기 시작한 셈이죠. 마침 대학에 신문방송학과와 광고홍보학과가 유행처럼 개설되어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고, 군부독재의 종언으로 재갈 물렸던 언론의 말문이 트여 정보의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창업 때부터 향도로 서 주시고, 지금은 광릉숲자락에서 같은 마을 사람으로 사는 오택섭 교수가 강현두ㆍ최정호 교수와 함께 쓴 《매스미디어와 사회》는 한국언론학도들에게는 대중사회와 대중매체를 이해하는 등불이자 베스트셀러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일변도의 이론을 수용ㆍ극복하여 우리의 담론을 창출한 점에서나 저렴한 가격과 함께 편집체제를 혁신한 점에서 구태의연하고 권위적인 벽을 넘어 사회과학교과서의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해 봅니다. 지난해에는 이 책을 헐고 다시 지은 《미디어와 정보사회》를 언론학계에 바쳐 우리도 이런 교과서를 가질 수 있다는 기쁨을 같이했습니다. 


언론학의 숲은 황무지 개척시대 때부터 뜨거운 고통의 땀을 같이 흘리며 항상 버팀돌이 되어 주었던 홍기선, 김영석, 이강수, 김민환 교수의 저술로 울창한 숲으로 푸르를 수 있었습니다. 언론현상의 학술적 조망과 연구자들에게 거침없이 열려있는 학술적 흐름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한종우 성곡언론재단 이사장과 함께 계간 《언론과 사회》를 창간했습니다. 여기에는 강명구, 강상현, 김승현, 양승목, 윤영철, 최현철 선생의 열정과 지성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술서적과 함께 언론현장의 하늘을 울리고 땅을 아우르는 언론인의 춘추직필(春秋直筆)을 펴냈습니다. 김중배 선배의 칼럼집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는 조태일 형의 창제인쇄소에서 한겨울의 추위를 강철난로불에 녹여가며 이제는 아련한 기억 속에 있는 납활자로 조판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쉽게 팔리지 않지만 오래 팔린다’는 모토로 간행한 사회학 도서들이 100여 권을 넘기며 차츰 지쳐갈 무렵 최일섭 교수의 지도로 복지국가와 사회보장의 앞날을 같이 모색한 70여 권의 ‘사회복지학 총서’는 힘들게 개척한 알토란같은 텃밭이며 사회과학출판의 큰 획을 그은 도약대였습니다. 이제는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함께 정보화사회와 인간다운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복지사회 구축이 담론의 중심이 되면서 ‘나남신서’라는 숲에 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장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이런 기획을 했느냐는 부러워하는 시선에는 먹고살기 위해 일했을 뿐이라는 농부의 대답밖엔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제 언론학과 사회복지학의 전문출판사라는 알찬 숲을 이루었습니다. 언론학도들만이 아니고 박봉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마감시간에 피 말리는 언론현장의 기자들에게도, 그리고 사회복지 연구자와 현장의 활동가들에게도 나남출판사로 인해 이젠 아카데미의 기댈 언덕이 생겼으니 모두에게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봉황이 깃을 틀 만한 숲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어른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25년의 군부독재가 그 막을 내리려던 1986년 무렵은 한국사회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혼돈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답답한 전환기에 무력감에 짓눌려 역사의 신의 존재라도 찾고 싶었던 때였습니다. 윤무한 선배가 원고를 어렵게 얻어 〈월간 경향〉에 선보인 이 시대의 마지막 광복군인 김준엽 전(前) 고대 총장님의 《나의 광복군 시절》이 눈에 번쩍 띄었습니다. 이 회고록을 임희섭 교수의 도움으로 나남에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일면식이 없었던 김 총장님은 “제자가 운영하는 출판사인데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하셨답니다. 항상 그 나름의 최선을 다해 출판한다고 자부했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에 동참하는 일인 만큼 ‘오자(誤字)와 싸우자’는 마음으로 지명ㆍ인명의 한문교정이나 문장을 가다듬는 일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의 현대사 공부도 새롭게 해야 했습니다. 책 제목은 모택동의 대장정에 버금가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김준엽의 현대사 ― 장정(長征)》이라고 붙였더니 선생님도 좋아하셨습니다. 이 책은 5만 부 넘게 팔려나가기도 했습니다만, 분단의 굴레에 주눅 들었던 젊은이들에게 광활한 대륙을 말달리며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선구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이 책은 2001년 전 5권이 완간될 때까지 제목처럼 15년 동안 장정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 책으로 항일의병운동, 광복군 무장투쟁 등 20세기 초반의 한국현대사에 관한 저술들이 집중되고 《백범전집》까지 제작함으로써 의연한 길을 걸었던 우리 시대의 역사의 신들과 도반을 함께하는 영광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총장님이 출입하시면서 불편해했던 서대문 충정로 인쇄소 4층에 세 들었던 출판사도 서초동 교대 앞에 사옥을 마련하여 이사하여 20년 가까운 강남시대를 사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장준하 선생과 함께 《사상계》를 냈던 총장님은 서울올림픽이 있던 해에 나남에서 오생근, 임현진, 이성원, 김인환 교수와 함께 《사회비평》을 창간하자 많은 격려를 해주셨고, 총장님께서 사회과학원을 창립하면서 시작한 《계간사상》 제작을 나남출판에서 15년 동안 뒷받침해 드렸습니다. 또 《한국언론과 출판저널리즘》으로 박사학위를 받던 날 사회과학원 여러 어른들과 함께 축하해 주셨던 밤도 잊을 수 없습니다.

1988년 상투화된 안일한 대답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질문다운 질문을 제기하고 진정한 종합화의 시각으로 공통의 문화공간을 기초하기 위해 창간하여 16년 동안 계속된 〈사회비평〉이라는 지적 저수지는 사회과학계의 신선한 돌풍이었다고 믿습니다. 밤늦게까지 춘천 가는 길을 걱정하며 토론에 열중했던 송호근 교수가 많은 시간을 함께했습니다만, 하영선, 염재호, 김용학, 서병훈, 정호근, 임혁백, 박길성, 김병국, 김호기, 함성득 선생들이 사회과학의 거대한 숲을 이루는 주역이었습니다. 


오생근 선생이 5년 넘게 번역에 매달렸던 《감시와 처벌》(감옥의 역사)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에 대한 개안이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 이 책으로 군대, 병원, 감옥의 일망 감시체제를 다시 생각하게 했으며, 김현 선생의 중세에는 정보를 얻기 위한 고문이 지금은 인성까지 파괴하는 야만성을 드러낸다는 말이 새롭습니다. 10년 후 이 책을 다시 재번역 출간해서야 마음을 놓았던 오생근 형과의 오랫동안 두텁게 쌓아온 우정과 배려는 《성의 역사》(전 3권), 《광기의 역사》의 출간까지 이어졌습니다. 삶처럼 고달픈 정글의 번역과정을 이겨낸 이규현 박사에게는 푸코의 광기에 휩싸임과 하나가 되어 있는 자유의 모습을 언뜻 엿볼 수 있었습니다. 광기의 지평에 머물러 있는 자유가 어둠 속의 찬란한 빛처럼 아름답고 숭고하게 순간적으로 반짝입니다. 


1996년에는 항상 청년정신으로 사시는 중민사상의 사회학자 한상진 교수의 안내로 독일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를 서울에서 만났습니다. 이성의 깃발을 든 전사였던 그를 사상의 우회로로 삼으며 소외극복과 민주주의 실현을 꿈꾸며 공부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의 비판이론을 여러 권 출간하면서, 주어캄프 출판사와는 우의를 같이하고 있으며, 곧 장춘익 교수가 3년째 매달리고 있는 《의사소통 행위이론》의 완역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도원의 결의처럼 최장집 교수의 지도로 출간한 박명림 박사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이후 《한국 1950: 전쟁과 평화》로 이어지면서 한 학자의 성장과정을 출판사와 함께하는 기쁨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을 얘기해야겠습니다. 1992년 병문안 차 목동의 김지하 선생댁에 들렀다가 부인이신 김영주 선생의 원고를 추슬러 《신기론으로 본 한국미술사》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내가 아니더라도 형의 민주화 대장정에 밑거름이 되어 준 누나의 헌신적인 고행(苦行)을 생각한다면 사회적인 조그마한 대접으로라도 벌써 세상에 나왔어야 했습니다. 따님의 책 출간을 계기로 그때까지 뵌 적이 없었던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김약국의 딸들》을 주셔서 어른의 가연(佳緣)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세기가 막을 내리는 베를린 광장을 같이 걷고 유럽의 문화에 눈뜨게 해준 김형국 교수는 우정어린 유려한 문장의 〈박경리 작가론〉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10여 년간 이청준 선생의 《황홀한 실종》을 시작으로, 홍성원, 황동규, 이제하, 정현종, 박완서, 김원일, 이문열, 한승원, 한수산, 김현, 김화영 선생의 ‘나남문학선’을 이끌어 오던 무렵이니 문학이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30여 년 전의 베스트셀러였던 이 작품은 나남에서 다시 50만 권이 넘게 팔려 사회과학출판의 커다란 재원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편집디자인이 좋았는지, 그해 여름의 한의사ㆍ약사 시위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한 세대를 넘나드는 시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인간에 대한 감동적인 애정을 독자들이 놓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10여 년간 《김약국의 딸들》 인세를 전해드리기 위해 원주시 단구동 박 선생님 댁을 드나들며 들은 생명에 대한, 삶에 대한 말씀들은 산사(山寺)의 문답처럼 내 성장의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년 전에 윤호섭 선생의 귀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새롭게 출판한 대하소설 《토지》 21권도 그렇습니다만, 작가가 이 시대를 온몸으로 보듬고 치열하게 살지 않고서는 그런 ‘역사로서의 소설, 소설로서의 역사’를 창조해 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토지》 출간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이 작품에 대한 수많은 문학평론들이 작가가 문학의 형식을 빌려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얼마나 열정을 갖고 잘 읽어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토지》의 원본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각오로 기존 판본을 비교하고 서너 차례 정독하면서 이 대작에 걸맞은 편집디자인과 함께 가독성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만, 본문 속에서 뽑아낸 저자의 육성으로 장(章) 제목들을 새롭게 붙이는 데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습니다. 하동 평사리 지리산 자락에서 토지문학제를 처음 열던 가을밤에 이를 흔쾌히 허락하신 대작가의 깊은 신뢰가 오히려 어깨를 무겁게 했으며 대작에 사족을 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계면쩍음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노작가는 대시인이셨습니다.


‘어둠의 발소리’에서 시작하여 ‘빛 속으로’ 마무리 짓는 이 작품 《토지》는 살아있는 신화의 괴로운 환희와 상처 입은 울음과 한 서린 꿈이 있고, 무명번뇌의 뿌리와 추적과 음모 그리고 생명의 강, 생명의 불꽃이 타는 그리움의 심연이 있습니다. 바닥 모를 늪 속에서 폭풍전야의 자유를 위한 선택과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가냘픈 희망의 그네를 뜁니다. 그리고 북극의 풍우 속에서 무력한 지성이 아닌 상처받은 짐승 같은 우리의 주인공들은 꿈속에서 지신을 밟습니다. 자유를 향한 길목에는 이율배반의 자비와 잔혹이 그리고 질기고 한 많은 인연이 있습니다. 꿈속의 귀마동에서 서희와 길상의 타는 목마름이 사랑으로 승화합니다. 여한이 없는 사랑은 아무래도 월선이입니다. 장엄하고 처절한 계절에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은 세월을 자맥질하는 해녀처럼 순수에의 고뇌와 허기지고 고독한 승리가 있는가 하면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는 욕망과 갈등의 자포자기도 있습니다. 풍차같이 도는 일상에서 탈출하여 푸른 은빛 밤하늘의 구름바다에 진달래 화전을 부치는 별당아씨와 마지막 동학군 김환 장군을 그려보십시오. 바람 부는 벌판에 선 끈질긴 우수가 타는 눈을 가진 순결한 젊은 그들은 누구입니까. 미친 세월에서 금기의 사랑에 대해 도전하는 젊은 사자들의 미처 못다 부른 노래는 슬픔이 빚는 진실입니까. 비애가 아닌 생명의 한을 가지고 자유인의 길을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바닥 모를 늪 속에서 사랑할 수 없는 불행과 집념과 포기의 싸움을 벌여야 하는 거미줄에 묶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 평사리의 어둠과 지리산 사나이들이 있고 지칠 줄 모르는 갈등과 서희의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함께 있습니다.

새천년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무엇엔가 쫓기며 해법을 찾으려고 헤맬 때였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과 함께 불안이 교직(交織)하면서 나만 게으름을 피우며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초조함이었겠지요. 출판사가 20주년을 맞이하고 저도 50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우선 자연채무처럼 안고 있었던 숙제 두 가지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고희(古稀)를 맞았습니다. 30여 년 선생의 주변을 감돌다 뒤늦게 박사공부까지 지도받았지만 선생을 책으로 모시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고희기념 “선집의 출판을 발상하고 힘겹게 결실을 맺”는 데에는 까치ㆍ두레ㆍ범우사ㆍ삼인ㆍ창비ㆍ한길사ㆍ한겨레신문사의 큰 도움이 있었습니다. 출판의 사회적 기능이 어디까지인가를 웅변으로 말씀하신 리 선생의 인사가 가슴 뭉클했습니다. “고희의 통과의례행사를 공동으로 마련해 준 그 출판사들은 지난날 야만적 독재정권들의 탄압을 무릅쓰고 나의 책을 출판해 준 민주적 문화운동의 선구자들이다. 나의 책을 출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반문화적 권력의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 출판사들과 그 발행인들의 사랑과 용기가 아니었던들, 30여 년에 걸친 기간의 문제작과 논쟁적 논문들은 물론, 여기 《동굴 속의 독백》에 수록한 부드러운 글들조차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20세기를 보내는 1999년 제야를 며칠 앞둔 밤의 일이었습니다. 작년 가을에는 김만수 박사가 잘 정리한 평전 《리영희: 살아 있는 신화》를 상재했습니다. 스승을 모시는 길에 아직도 걸음마도 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소년 때부터 그의 선비정신을 흠모하며 사숙(私塾)했던 큰 스승인 지훈 선생의 뜻을 나 혼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갖고 싶었습니다. 돌아가신 지 32년이 된 이 어른의 뜻이 21세기 지금에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2000년에 내 마음속의 상투를 자르듯이 사상의 자유시장에 ‘지훈상’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대학졸업 무렵에는 ‘사헌’(史憲)이라는 별칭을 주실 만큼 정을 주신 한동섭 헌법선생님에게 “지훈이 법학을 전공했다면 이 사회에 무슨 일을 했을까요?”라고 물으며 선생의 먼발치라도 서 보고 싶었던 숙제였습니다. 나남출판이 왜 이 상의 운영주체여야 하는가를 자문해 보면서 ‘굽은 노송이 선산 지킨다’는 속담으로 대답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김종길, 신일철, 조동걸, 신용하, 홍기삼, 인권환, 김인환, 이성원, 오탁번 선생이 그 뜻을 같이했습니다. 선생님 부인 김위남(난희) 여사와 박노준 교수가 거의 일을 도맡으셨고, 홍일식 고대 총장을 지훈상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모셨고 저는 상임운영위원으로 이 상의 운영실무와 재원을 책임 맡았습니다. 《지훈전집》을 다시 완간한 지도 삼사 년이 지났고, 자매지 〈사회비평〉과 〈포에지〉도 매체로서 그 영향력을 키우고 있어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훈문학상’과 ‘지훈국학상’의 두 부문을 시상하고 있습니다만, 힘이 닿으면 ‘지훈언론상’도 준비했으면 싶습니다. 


“거짓과 비겁함이 넘치는 오늘, 큰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기치는 ‘지훈상’과 함께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 분 한 분 거명하지 못해 예의를 갖추지 못했습니다만, 이 책에 실린 2,000여 명의 아름다운 사람들은 책 한 권 한 권 출판할 때마다 가장 궁핍한 시기에 칼날 위에서 춤추듯 긴장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한 생명의 불꽃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이 한국사회의 중심을 관통하는 들불처럼 타올라 지금은 이 사회 어디에서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한다는 희망 속에 자유의 활화산으로 우뚝 서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궂은일 마다치 않고 성심성의껏 그 많은 다종소량의 책들을 꼼꼼하게 제작해준 삼화인쇄의 류성근 사장과 박삼협 부장에게 우정어린 감사의 절을 드려야 합니다. 어쩌면 제가 지난 4반세기 동안 한 일은 간이역의 외로운 역장 노릇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남출판이라는 자유의 광장을 지나갔습니다. 길을 묻던 사람들도, 늠름하게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과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저수지는 산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 맨 밑에 자리 잡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저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항상 잊지 않겠다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4반세기를 준비하는 튼튼한 보(洑)를 이제는 파주 출판문화단지에 쌓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닥터 지바고’의 파스테르나크 생가에서 보았던 자작나무의 숲도 일구려고 합니다. 


이 나남출판이라는 지성의 저수지를 갈무리하면서 보낸 시간들의 기록을 여러분께 감히 보여드리는 부끄러움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2004년 한여름
나남출판 대표이사 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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