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말한다] ‘느림’과 ‘비움’의 1099일
작성일 : 05.08.16   조회수 : 1557

이코노미스트 | 801호, 2005. 8. 16.

 

[이 책을 말한다] ‘느림’과 ‘비움’의 1099일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일상에서 벗어나 길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귀한 것이다. 혼자 또는 여러 사람이 목적을 갖고 떠나는 여정일 수도, 굳이 고생을 사서 하려는 젊은 날의 배낭여행일 수도, 또 짐짓 나그네 차림으로 여유를 갖고 익숙한 것을 돌아보려는 사치스러운 길일 수도 있다. 《나는 걷는다》(고정아 옮김, 2003년, 효형출판, 전 3권)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오직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철저히 두 발로 걸어 쓴 이 책은 ‘느림’과 ‘비움’과 ‘침묵’에 절로 빠져들게 하는 ‘걷기’의 1,099일, 그 대기록이다.

신문기자를 정년퇴직한 후 예순둘의 나이에, 동료들이 인생의 2모작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는 탁상공론에 빠져있을 때, 그는 미지의 세계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1만2000㎞에 이르는 전설의 길 실크로드를 4년 동안 걸어서 완주한다. 그는 동ㆍ서양의 문화와 문물이 교통하는 대상(隊商)들의 그 길을, 바로 그들이 걷던 대로 하루 30~40㎞씩, 짐을 실은 낙타의 느린 걸음처럼 9시간에서 10시간을 걷는다.

그는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자연 그대로의 몸짓으로, 맨살로 길을 걷는다. 도시를 뒤흔드는 불안한 광기와 일상의 스트레스, 끝없이 반복되는 욕망, 미덕으로 격상된 공격성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대신 새로운 것들을 만난다. 부지불식간에 변하는 풍경, 흘러가는 구름, 변덕스러운 바람, 구덩이 가득한 길, 그리고 가볍게 흔들리는 밀밭도 있다. 마치 순진한 화가의 팔레트가 만들어 낸 것 같은 거대하고 장엄한 풍경이다. 이런 것들에서 끝없이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느리게, 천천히 걷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걸음은 눈높이 그대로의 세상을 만나게 해준다. 사람들은 걸음으로써 시선을 올바른 차원으로 되돌리고 시간을 다스리는 법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걷는 사람은 왕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데서 오는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지만,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조립식 소파의 안락함보다 세계의 넓은 공간을 선택한 왕. 그는 “내 안에 차곡차곡 쌓였던 제약과 두려움에서 내 머리와 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고 말한다.

걸음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비우게 되는 내면의 두레박질을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누구나 어떤 의미의 육탈(肉脫)을 꿈꾸어 보지만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걷기만큼 쉬운 것이 있을까? 그렇지만 그토록 쉬운 것에서 자신을 비워내고, 자신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걷기는 숭고하고 위대한 것이리라.

지루한 걷기의 지속에서 계산과 이해(利害), 환상적 욕망으로 가득 찬 도시적 사유(思惟)는 중지된다.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으로 한없이 빠져들어 간다. 침묵이다. 그런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만나고, 또 산정에서 만난 서늘한 바람처럼 정신을 서늘하게 할 지혜를 보게 된다. 지혜란 길을 따라 걷는 중에 얻어지는 법이다. 가끔 더 좋은 모습으로 세상에 되돌아오기 위해 고독이라는 치료법과 고립이라는 약이 필요하다. 걷기는 그 좋은 치유법이다.

그를 따라 그의 보폭에 맞춰 상상 속의 행군을 같이 해 보자. 구불구불한 길을 느리게 걸으며 고요한 영혼을 보고, 강한 존재감과 혈관 속에 흐르는 생생한 삶의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혼자이고 싶고 걷는 중에도 자신과의 대화에만 열중인 늠름한 그 사람 곁에 부러운 마음으로 그의 그림자가 되어보자. 일상의 기적을 이루는 힘이 될 걷기의 경이로움이 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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