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작성일 : 14.12.01   조회수 : 1362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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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했습니다.” 스물다섯 청년이 프로야구 정규시즌 최우수 선수 트로피를 치켜들며 포효하는 대신 침착하게 전한 수상소감의 한 구절이다. 넥센 히어로 서건창 선수가 그이다. 홀로 된 어머니에게 강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더욱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꿈의 구장에 우뚝 선 그는 작은 거인이었다. 오랜만에 젊은 기상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청년에게 박수를 보낸다. 


1982년 정통성을 잃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국민을 다독거리려고 선보인 미국 일본을 본뜬 프로야구가 갈수록 인기를 더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청년문화의 재건을 앞세운다는 국풍(國風)이라는 생뚱맞은 법석을 떨던 관제 페스티벌도 그때 기획되었다. 그랑프리를 차지한 더벅머리 청년 이용이 부른 ‘잊혀진 계절’은 잊히지도 않고 지금도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이 노래가 불린다. 이제는 공적인 페스티벌이 많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중고등 여학생부터 젊은 여성들이 프로야구 관전보다 야구장을 그들의 감추어진 욕망을 분출하는 해방구로 만든 듯하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단인 붉은 악마 때 경험했던 허락된 일탈의 외침들을 추체험하는지도 모른다. 함께 어울려 춤추는 그 광장에는 원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삶의 축약을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전설들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전설의 진면목은 화려한 축제의 무대에 서기까지 흘린 땀의 결정(結晶)이다. 바다에 떠 있는 빙산(氷山)의 일각(一角)은 9할 이상의 몸 전체를 캄캄한 바닷속에 밀어 넣고 지탱해야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우람한 소나무는 그 키의 절반만큼의 주근(主根)이 땅속 깊이 박혔을 때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곧추설 수 있다.


서건창 선수는 안락한 카페에서 처세술이나 미리 공부하며 청년실업의 주술(呪術)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여느 청년들과는 달랐다. 명문대학의 스카우트 제의도 생활비 마련이라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선택한 연습생의 덫도 뛰어넘어야 한다. 오랜 벤치워머 끝에 찾아온 행운의 핀치히터의 설렘도 늠름하게 극복하며 안타를 쳐내야 한다. 우선은 학맥 인맥의 정글에서 두 집이라도 만들어 완생(完生)시켜야 하는 미생마(未生馬)를 끌고 피 터지는 수읽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항상 연습을 거듭해야 하는 흙 묻은 낡은 유니폼과 아물지 않은 부상의 흔적들을 그의 훈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무대의 조명이 꺼지면 남들이 잠드는 달밤에도 피멍이 들도록 야구배트를 휘둘러댔던 고독한 밤들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숙명의 이 길은 혼자 가야 한다.


삶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자신의 존재를 잊고 안락하게 살아가면 된다. 그러나 내가 나일 수 있으려면 나의 길을 개척하고 묵묵히 가야 한다. 내가 가지 않은 길에 한눈을 팔 겨를도 없다. 누군들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는 황홀한 비상(飛翔)을 꿈꾸지 않겠는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삶을 살라고 강요하며, 개인의 노력을 정당한 대가로 평가해주는 관용의 폭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사회의 생태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해서 내가 나로서 살아 남아야 하는 고비 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위에 자신을 다그쳐 세워야 한다. 이제까지 꿈은 이루어진다의 신념으로 걸어온 호시우행(虎視牛行)의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보이지도 않는 적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할 일은 아니다. 미지(未知)의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의 모험이나 사회의 냉대에 대한 복수의 심정은 더욱 아니다.

스스로 인정하기에는 불편하지만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때는 늠름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이는 낭떠러지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이제까지의 걸음 그대로 한 걸음 더 내딛는 용기가 그것이다. 열정(passion)은 문자 그대로 괴로움과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는 고난을 수반한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했다. 내가 선택한 길은 걸어가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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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프로야구가 시작할 무렵 우연히 인사동 골목에서 구입한 액자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 글씨였다.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의 진공 같은 시절도 하수상했고, 안개의 깊이만큼 앞길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모든 상황이 강퍅한 출판사 초창기였다. 유명 서예가의 작품도 아니고, 익히 알던 글귀도 아닌 조그마한 액자에 끌려 부지불식간에 지갑을 열었다. 운명은 우연히 방향을 잡기도 하는 모양이다. 제대하기 전 최전방 방책선 참호에서 세월을 낚으면서 나무판에 새겨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주먹을 불끈 쥐었던 충무공의 ‘尙有十二’는 태고의 음향 속에 묻고, 이 글귀를 새롭게 가슴에 품었다. 아직도 내게는 열두 척의 배라도 남아 있다는 자긍심마저도 백척간두에 세우고 그 걸음 그대로 한 발짝을 더 내딛기로 했다.

 

조그마한 사무실 벽에 이 글귀를 걸어 놓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볼멘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때마다 이 글대로 벼랑 끝에서 또 한 걸음을 수없이 내디뎠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 같은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마다 떨쳐 일어나 더 멀리 또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굴러떨어진 바윗덩어리를 산 정상으로 다시 올려야 하는 일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하는 천형(天刑)을 받은 신화 속의 시지프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단순 반복의 도로(徒勞)였지만 그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믿음의 탑을 쌓았다. 


노인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 요즘에는 고등학생 때 읽고 감동한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 〈큰바위 얼굴〉을 다시 생각한다. 큰 바위 얼굴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나 미륵불(彌勒佛) 같은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선은 자신의 의지대로 백척간두에서 한 발짝 더 내디딜 일이다. 자신의 성장통을 이겨내면서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대함이 깊어지면 어느새 큰바위 얼굴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글귀(百尺竿頭進一步 大死一番底)가 큰 스님의 화두(話頭)였다고 하니 화식(火食)을 하는 나에게는 너무 큰 바위를 머리에 얹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이 액자를 전 직원이 쉽게 볼 수 있게 엘리베이터 옆에 비밀의 문처럼 앙증맞게 걸어 놓았다. 없는 것을 찾는 젊은 그들은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름다운 청년들은 또 아름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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